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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윌리암. J. 피터슨

 역자 : 백금산 목사

 출판 : 부흥과 개혁사

 책소개 :
 20세기 그리스도인들의 독서습관을 감동적으로 소개해 주는 책, 복음주의 입장에서 살펴본 20세기 100년동안의 기독교 베스트셀러, 혹은 스테디셀러를 연도별, 시기별로 해설하고 소개하여, 20세기 교회가 시대마다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분야, 주제, 문제 등이 무엇이었는지를 발견하게 해준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읽기 쉽게 정리하여 현대 기독교의 걸작들은 두루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작가소개 : 윌리암.J.피터슨
1950년 기독교 잡지에 서평을 시작해 1955년에 기독교 출판시장에서는 처음으로 크리스천 북셀러 잡지를 시작하여 초대 편집자가 되었다. 1958년에는 이터너티 잡지의 편집 책임자로서 미국 전역의 전문가들의 투표로 가장 좋은 책 25권을 뽑는 올해의 기독교도서 대회를 시작했다. 1997년에는 복음주의 출판 협의회의 추천으로 우수 기독교 정기 간행물 발간의 공로로 최초의 '조셉벨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기, 성경공부, 이단, 찬송가학, 여행 등에 관한 2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으며, 현재 펜실베이니아에서 기거하면서 플레밍 레벨 출판사의 수석 편집자로 있다   (출처 : 리브로)


1.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1899) 찰스 셀던
2.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 이루자 (1900) 존 모트
3.능력에 대한 조용한 담화 (1901) S.D.고든
4.노예 출신의 교육자 (1901) 부커 워싱턴
5.그리스도의 생애적 사건 (1903) 캠벨 모건
6.헐버트의 이야기 성경 (1904) 제시 리먼 헐버트
7.기도의 능력 (1907) E.M.바운즈
8.스코필드 관주 성경 (1909) C.I.스코필드
9.바울의 선교방법과 우리의 선교방법 (1912) 롤런드 앨런
10.성도의 영적전쟁 (1912) 제시 팬 루이스
11.국제 표준 성경사전 (1915) 제임스 오르
12.근본진리 (1919) A.C.딕슨 외
13.기독교와 자유주의 (1923) 그레셤 메이첸
14.할리 포켓 성경 핸드북 (1924) 헨리H.할리
15.정통 (1925) G.K.체스터턴
16.사막의 샘물 (1925) 레티 카우맨
17.인도의 그리스도 (1925) 스탠리 존스
18.주님은 나의 최고봉 (1927) 오스왈드 챔버스
19.기독교 신앙의 기초 (1927) 플로이드 해밀턴
20.실제적 종교 (1928) 새뮤얼 슈메이커
21.누가 돌을 옮겼는가? (1930) 프랑크 모리슨
22.기도 (1931) 올 할레스비
23.개인 기도 일기(1936) 존 베일리
24.교회 교의학 (1936) 칼 바르트
25.예배 (1936) 에블린 언더힐
26.제자도의 대가 (1937) 디트리히 본 회퍼
27.증인 (1937) 그레이스 리빙스턴 힐
28.만약 (1938) 에이미 카마이클
29.창조자의 마음 (1941) 도로시 세이어스
30.주님의 옷 (1942) 로이드 더글러스
31.스쿠루테이프의 편지 (1942) C.S. 루이스
32.현대 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 (1947) 카알 헨리
33.칠층산 (1948) 토머스 머턴
34.울어라, 사랑받은 조국이여 (1948) 앨런 페이턴
35.하나님을 추구함 (1948) A.W.토저
36.팔레스타인의 고고학 (1949) 윌리엄 올브라이트
37.영혼의 평화 (1949) 풀턴 쉰
38.마틴 루터의 생애 (1950) 롤런드 베인턴
39.나니아 왕국 이야기 (1950) C.S.루이스
40.피터라는 이름의 남자 (1951) 캐서린 마셜
41.그리스도와 문화 (1951) 리처드 니부어
42.순전한 기독교 (1952) C.S.루이스
43.긍정적 사고의 힘 (1952) 노먼 빈센트 필
44.당신의 하나님은 너무나 작다 (1952) J.B.필립스
45.매일 성경공부 (1953) 윌리엄 바클레이
46.새 성경주석 (1953) F.데이비드슨 외
47.하나님과의 평화 (1953) 빌리 그레이엄
48.하나님의 가족 (1953) 레슬리 뉴비긴
49.과학과 성경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 (1954) 버나드 램
50.하나님의 다리 (1955) 도널드 앤더슨 맥가브란
51.가벼운 짐 (1955) 유제니아 프라이스
52.사해문서에 대한 재고 (1956) F.F.브루스
53.영광의 문 (1957) 엘리자베스 엘리엇
54.인격의 의미 (1957) 폴 투르니에
55.자유를 항한 발검음:몽고메리 이야기 (1958) 마틴 루터 킹
56.기독교의 기본진리 (1958) 존 스토트
57.복음 비행기 (1960) 조셉 베일리
58.상담 심리학 (1960) 클라이드 내러모어
59.새 성경사전 (1961) J.D.더글라스
60.헌신된 군사들 (1961) 엘턴 트루블러드
61.창세기의 홍수사건 (1961) 존 휘트콤 외
62.인간: 하나님의 형상 (1962) G.C. 벌카우어
63.시간의 주름 (1962) 마들렌 랭글
64.리빙 바이블 (1962) 케네스 테일러
65.십자가와 칼 (1963) 데이비드 월커슨
66.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 (1964) 존 세릴
67.영적 침체 (1965) 마틴 로이드 존스
68.이단의 왕국 (1965) 월터 마틴
69.새포도주의 맛 (1965) 키스 밀러
70.당신이 믿는 이유를 알라 (1967) 폴 리틀
71.크리스티 (1967) 캐서린 마셜
72.적극적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라 (1967) 로버트 슐러
73.존재하시는 하나님 (1968) 프란시스 쉐퍼
74.과감하게 징계하라 (1970) 제임스 도브슨
75.도시의 의미 (1970) 자끄 엘룰
76.대유성 지구의 종말 (1970) 할 린드시 외
77.창조의 여덟째 날 (1971) 엘리자베스 오코너
78.피난처 (1971) 코리 텐 붐 외
79.기독교의 증거 (1972) 조시 맥도웰
80.상처 입은 치료자 (1972) 헨리 나우웬
81.완전한 여인 (1973) 마라벨 모건
82.하나님을 아는 지식 (1973) J.I.패커
83.수용소 군도 (197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84.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1974) 리사 스칸조니 외
85.거듭남 (1976) 찰스 콜슨
86.조니 (1976) 조니 에릭슨 외
87.성경을 위한 전투 (1976) 헤럴드 린드셀
88.가난한 시대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1977) 론 사이더
89.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훈련 (1978) 리처드 포스터
90.진리를 말함 (1979) 프레드릭 부에크너
91.은퇴한 어머니는 어디로 가는가? (1979) 바바라 존슨
92.소금그릇 밖으로, 세상 속으로 (1979) 레베카 맨리 피퍼트
93.만일을 위한 정의 (1982) 존 퍼킨스
94.예배는 동사다 (1985) 로버트 웨버
95.우리 시대의 영적 전투 (1987) 프랑크 페레티
96.남자의 모범 (1989) 패트릭 몰리
97.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1990) 헨리 블랙가비 외
98.아,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1990) 필립 얀시
99.남겨진 사람들 (1995) 팀 라헤이
100.새들백 교회 이야기 (1995) 릭 워렌

부록1: 20세기를 움직인 100권의 책 중에 현재 몇 권이나 읽었는지를 체크해 보자
부록2: 201세기를 움직인 100권의 책 목록 중에 이미 국내에 번역된 도서목록
2007/06/28 09:49 2007/06/28 09:49
찰스 스펄전

우리 주님의 성품을 가만히 묵상해 보노라면, 거기에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기질이 우세하거나 두드러지는 일이 없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그 자신에게만 강하고 특유한 기질이 응집해 있어서 베드로의 한 특성이 당신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의 경우도 하나의 아름다운 성품이 당신을 사로잡을 수 있지만 그의 다른 장점들이나 품위 있는 특성들은 관찰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아름다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의 성품 중 어떤 덕이 가장 순수하게 두드러지며 빛나는가를 발견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을뿐더러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주님의 인격은 마치 고전이 아니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각각의 특성 하나 하나가 나머지 전체와 정확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일 당신이 고전미를 드러낸 작품을 본다면 아마도 전체적으로 빈틈없는 그 미적 감각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반짝이는 눈이라 든다 혹은 세워진 코나 산호 같은 입술이니 등등으로 따로 분리시켜서 작품의 우수함을 말할 수 없게 된다. 각 부분을 서로 나누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완벽한 조화미에서 얻는 감명이 당신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이와 같은 완성된 성품은 우리가 노력하여 우리 안에도 이루어야 될 성품이다. 가장 희귀한 향기를 발하기 위해 모든 좋은 향기들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께서만이 하실 수 있지만, 그것을 찾고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허락하시는 성품이다. 이처럼, 우리 주님의 성품은 한 마디로 묘사되지 않는다.

요한 이나 베드로, 혹은 바울의 인격의 특징들은 우리가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고 특이한 양태를 지니지만, 주님의 인격은 우리의 묘사력으로는 그릴 수가 없는. 측량할 수조차 없는 성품을 지니고 계신다. 그에게는 뛰어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것이 있으며, 흠도 점도 없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며 각 부분 부분이 하나로 통합되어져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도 사모하고 닮아가야 할 것이다. 영원한 우리의 훈련과 싸움의 목표도 주님의 이 성품을 우리의 인격 속에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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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6 20:48 2007/04/16 20:48
이길함(Graham Lee)


1906년 8월에 우리 평양에 주재하는 선교사들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삶을
더 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1주일간 사경회를 개최했다.

원산의 하디 박사가 와서 우리에게 대단한 도움을 주었다.
성령께서 그 집회를 통해 우리의 삶을 완전히 통제하시며 그분을 섬기는 일에
우리를 놀랍게 사용하시기를 사모하도록 우리의 심령에 간절한 열망을 불어넣어주셨다.

사경회 후 즉시 우리는 서울로 올라가 연례회의에 참석하였으며, 거기서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Hpward Agnew Johnston)을 만났는데 그를 통해
서울 선교사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존스톤 박사는 평양에 와서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 인도에서 나타난 놀라운
성령의 현시에 대해 들려주었으며 그 이야기를 들은 한국인들 몇 사람이 같은
축복을 받기를 대단히 열망했다.

그 때로부터 축복이 임할 때까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은 놀라운
부흥이 임하도록 기도해왔다.
우리가 연례회의에서 돌아와 성령의 부으심이 임하도록 간구하면서 얼마 동안
특별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 때에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그 집회를 즐겼으나 성령께서는 권능 가운데 우리와 함께
임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를 계속하였고, 그리스도 마스 때에
우리 선교사들 심령에 한 주간 특별 기도회를갖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불어 넣어주셨다.

이 특별 기도회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한 유익이 있는 집회였다.
이 집회가 마치기 전에 평안남도 겨울 남자도 사경회가 시작되어
약 700명의 남자들이 성경공부를 하며 2주를 보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이 사경회 동안에 특별한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 장로교 선교사들은 매일 정오에 모여 사경회를 위해
기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정오 기도회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이 정오 기도회가 우리에게 바로 벧엘이었기 때문이다.
1월 6일에 우리는 평양시내 네 개의 장로교가 연합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와 평양시내 사람들을 위해 저녁집회를 시작했다.

만약 남녀를 같이 참여하도록 한다면 장소가 너무 협소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여성들의 경우 네 개의 다른 장소에서 학교 남학생들의 경우
중학교 예배실에서 별도로 모임을 갖도록 요청하였다.

장대현교회에서는 단지 남자들만 참석하였다.
장대현교회는 약 1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매일 밤 교회는 사람들로 꽉 찼다.
토요일 저녁까지 매일 밤 집회 가운데 주의 능력이 점점 강하게 나타나 토요일
저녁집회는 그 때까지 열린 저녁 집회 가운데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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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6 20:35 2007/04/16 20:35
기도(Prayer)
Theology, (2007/04/16 20:33)
 
                                                                                                       유해무 교수

“그대가 신학자라면 참되게 기도하리라. 그대가 참되게 기도하였다면, 그대는 신학자이다.”. “Si theologus es, vere orabis, sique vere oraveris, es theologus (Ei qeologoj ei proseuxh
alhqwj kai ei alhqwj proseuxh qeologoj ei)”, Euagrius, De oratione, lx, MPG 79, 1179b.


       현금 한국의 몇 웹 사이트가 매주 몇 편의 설교 본문 전문을 공개하고 있다는 소문이 항간에 돌고 있다. 지나치게 분주한 한국 목회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친절함에 매료될 위험은 아주 크다 하겠다. 그러나 기도 중에 이루어지는 주해와 묵상이 생락된 설교를 팔고 사는 것은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자행하였던 바와 같이 도둑질에 해당됨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교회당에 앉자 마자 먼저 기도부터 한다. 설교를 통한 성령의 조명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설교는 지성만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를 하는 자와 듣는 자가 동시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설교를 할 수 있으며, 또 그 설교를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성도는 설교자를 위하여 미리 기도하고,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설교 전에 간구한다. 이는 고대 동방교회에서 정착된 ‘성령부름’ (epiklhsij)에 해당되는 아주 아름다운 전통이다.

       기도에 관해서는 대륙-개혁파와 영국-장로교 전통 사이에 모종의 차이가 있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은 가장 중요한 감사의 항목으로서의 기도를 말하는 반면에, 웨스트민스터표준서들은 기도를 설교 및 성례와 함께 은혜의 방편으로 본다. 전형적인 개혁파 기도해설서로는 드 퀘벵의 「기도」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성화의 맥락에서 기도를 다룬다. 그는 기도가 개혁자들에게는 신학의 중심 주제였으나, 개신교 정통주의에서는 그 중요한 위치를 상실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교의학자들이 기도를 백안시함으로써 실천신학자들을 궁지에 밀어넣고 있다는 투르나이젠의 말을 인용한다.. De Quervain, Das Gebet, Zollikon-Zürich 1948, 13. Thurneysen, Die Lehre von der Seelsorge, 1946.

       헨드릭 벨코프도 기도가 신앙론에서는 무시당한 주제라고 불평하였다. 그는 칼빈을 예외로 들면서, 그가 기도에 25항들을 할애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루터파의 슈미트(H. Schmid)와 개혁파의 헤페(H. Heppe)가 16세기와 17세기의 루터파와 개혁파의 저서들로부터 교의학적 주제들을 채집하여 정리한 교의학에는 기도라는 항목이 아예 나오지 않았지만, 다시 현대의 여러 신학자들이 기도를 새로운 신학적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비판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두커스는 벨코프의 이런 주장에 반하여 개신교정통주의시대의 개혁파신학자들이 기도를 아주 장황하게 다루고 있음을 잘 반증하였다.. H. Berkhof, Christelijk Geloof, 483; L. Doekes, 'Het gebed in de gereformeerde dogmatiek na Calvijn', in C. Trimp, ed., De biddende kerk, Groningen 1979, 43-83.
사실 개혁 이후, 기도는 교의학이 아니라 윤리학에서 다루어졌다는 것을 벨코프는 간과하고 있다. 게다가 기도는 그가 지적한 것 이상으로 현재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많이 취급되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비판에는 일리가 있다. 즉, 신학 연구에서 기도가 차지 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 실제로 신학자들이 기도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기도가 감사의 표현인지, 은혜의 방편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경건함과 기도는 사실상 같으며 하나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F. Schleiermacher, Predigten, I, Berlin 1843, 24.
그의 영향으로 독일어권에서는 기도는 ‘경건성을 재확인하는 가장 신뢰할만한 표지’라는 입장이 정착되었다.. P. Althaus, Zur Charakteristik der evangelischen Gebetsliteratur im Reformationsjahrhundert, 1914, 4. 로마교신학자 K. Heiler는 종교사적이며 종교심리학적 관점에서 기도에 관한 큰 부피의 책을 썼으며, 그 또한 경건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Das Gebet, Katholischer und evangelischer Gottesdienst, München 1921.
최근에는 기도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교의학 뿐 아니라 신학의 각 분과에서 기도를 주제로 한 단행본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구약에서는 Henning Graf Reventlow의 Gebet im Alten Testament, Stuttgart-Berlin- Köln-Mainz 1986, 신약에서는 Oscar Cullmann, Das Gebet im Neuen Testament, Tübingen 1994이 대표적이 예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기도의 이해에 관한 학위 논문들도 있다. 칼빈에 대해서는 Hans Scholl, Dienst des Gebetes nach Johannes Calvin, Stuttgart 1968, 루터에 대해서는 스웨덴의 신학자인 Gunnar Wertelius, Oratio Continua: das Verhältnis zwischen Glaube und Gebet in der Theologie Martin Luthers, Lund 1970, 그리고 멜랑톤에 대해서는 Martin H. Jung이 아주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다, Frömmigkeit und Theologie bei Philipp Melanchthon: das Gebet im Leben und in der Lehre des Reformators, Tübingen 1998.
이처럼 대륙의 신학에서도 기도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핵심이 기도라는 의견이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런 연구서들은 기도를 경건의 표지 또는 성화의 일면으로 본다. 따라서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보는 웨스트민스터신조의 입장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입장은 여하한 다른 신조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며, 최근 연구문헌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은혜의 방편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하며 당신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는 신앙을 일으키는데, 이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즉,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오시는 것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신조는 은혜의 방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은혜의 방편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은덕들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외적이고 정상적인 방편들이며, 이것들은 당신이 제정하신 것들인데, 특히 말씀, 성례와 기도이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116문답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4문답 및 소요리문답 88문답.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리문답은 기도가 그리스도의 은덕들을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기도의 정의를 제시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함으로써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은혜의 방편이라는 측면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로 설명되어 있다.. “복음 사역에서 기도는 설교에 뒤지지 않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없는 자는 완전한 사역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에게 전달되어야 하고, 인간의 일은 하나님 앞에 전달되어야 한다”, J.A. Bengel, Gnomen Novi Testamenti, Tubingae 1855, 451 (행 8:15)
요리문답은 계속하여 주기도문을 강해한다. 왜 요리문답이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불렀는지가 불분명하여 진다.
       그렇다면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부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가? 특이하게도 청교도나 장로교신학자 중에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를 다루는 예가 거의 없다. 우리는 이 대답을 루터와 칼빈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루터는 기도에 대하여 아주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감사가 아니라 인간의 소원이 주를 이루는 중세의 미사를 비판하였다. 미사에서는 받은 은사에 대한 감사보다는 인간적 위기나 위험에서의 구출이 전면에 등장한다. 루터는 이를 반대하면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더 강조하였다. 그는 기도를 믿음의 사역으로 보면서, ‘감사의 예배’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례에서 당신의 교중에게 하감하시는데, 하나님의 하감을 우리는 오직 감사의 예배를 통해서만 영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은혜의 방편들로써 은혜를 시혜하시며, 교중은 하나님의 이 사역을 믿음의 기도와 감사로써 수혜한다.. "durch die predig kompt er herab, sso kommen wir durch den glawben hynauff", Auff des Euangelion Marci am lezten, in Predigten des Jahres 1523, in WA, 12, 565, 20-21; "denn das unser lieber Herr selbs mit uns rede durch sein heiliges Wort, und wir widerumb mit jm reden durch Gebet und Lobgesang", Predigten des Jahres 1544, in WA 49, 588, 16-18.
루터에게는 찬양의 제물로서 감사의 제사가 기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는 수혜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잘 이해되어진다. 감사의 예배에서 신자는 이미 받은 은사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장래에도 주실 은사들을 대망한다.. “denn gegen Gott konnen wir nicht mehr handeln denn auff zwo weise, nemlich, mit dancken und biten, Mit dem danck, ehren wir jhn umb die guter und gnaden, die wir schon bereit empfangen haben, Mit dem beten ehren wir jhn umb die guter und gnaden, die wir hinfurt gerne hetten, · Das ist sacrifcium laudis et sacrificium orationis”, Vermahnung zum Sakrament des Leibes und Blutes Christi, in WA 30/2, 622, 35-623,3.
이미 받은 은사들은 수혜하시는 하나님의 장래적인 계시에 대한 소망인 기도를 계속 하게 하는 방편이 된다.. V. Vajta, Die Theologie des Gottesdienstes bei Luther, Stockholm 1952 (21954), 296.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인간적인 행위인 기도의 공로로 보아서는 안 된다. 흔히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상(浮上)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지속적인 기도를 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끌어내려 기도를 듣고 응답하게 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것은 기도를 공로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에 대해서 기도가 하나님의 계명이요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Von dem Gebete, in WA 30/1, 193,16ff, 195, 30ff. 칼빈에 대해서는 H. Scholl, 36-38을 보라.
기도는 계명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도를 항상 들어주시며, 이 응답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 기도의 약속은 곧 응답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기도가 지니는 사죄의 요소도 지적한다. 이처럼 그는 기도를 공로로 보는 잘못울 경계한다.. Ein Sermon von dem Gebet und Procession in der Kreuzwoch, 1519, in WA 2, 175, 12ff.
기도에서는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올리워진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오시는 길이다. 즉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며 당신의 중보사역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다.”. Vajta, op. cit., 300.
그리스도는 기도자가 제물로 바쳐지는 제단이며, 그리 하여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 이 점에서 기도와 찬양의 제사는 상호 교차한다.. “Der ist unsser alltar, auff dem wyr geopffert sind, auff der wolthatt mussen wyr dancken und darynnen beten”, Adventspostille 1522 (Phil. 4:4-7), in WA 10/2, 184,18; “altare nostrum est Christus, ipse sacerdos et hostia et altare nostrum, super quem nos impositi offerimur deo patri, et in ipso omnia nostra sacrificai offerimus”, Dictata super Psalterium, 1513-1516 (LXXXIII), in WA 3, 646, 13ff.

       물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뿐 아니라 기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오시는 길’이라는 사실도 부각시키려고 한다. 기도는 우리의 중보자께서 실현시키신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이다.
       칼빈은 성령론의 성화의 맥락에서 기도를 다룬다. 그는 기도의 두 요소를 부각시킨다: 기도는 신앙의 주된 사역이며, 기도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덕들을 매일 받는다 (III,xx). 기도는 신앙의 사역이며 이 점에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덕들을 기도를 통하여 받기 때문에, 기도가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는 길이라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모든 선한 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고, 구원의 수단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떠나서 자기 바깥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기꺼이 그리고 넘치게 계시하신다.”. “Hoc postea nobis explicatum est, Dominum sese ultro ac liberaliter in Christo suo exhibere, in quo pro nostra miseria omnem foelicitatem, pro nostra inopia opulentiam offert”, Opera selecta, IV, 297,1-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비참 대신에 구원을 제시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천국의 보물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게 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물을 받게 된다. 신앙이 복음에서 나오듯이, 우리의 마음도 복음의 훈련을 받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천국의 보물을 발굴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섭리와 능력의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을 간구하며,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며 지키시고 도와주신다. 또 죄로 인하여 가련하여진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의 인자하심을 통하여 은혜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신다. “즉, 기도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며 당신을 계시하여 주실 것을 간구한다.”(III,xx,2). “qua denique totum ipsum, ut se nobis praesentem exhibeat accersimus”, Opera selecta, IV, P. Barth & G. Niesel, ed., 298,8-9.

       위에서 보는 대로 칼빈은 기도가 지닌 계시의 성격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기도의 교사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사 옳은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의 정념을 제어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게 하신다(III,xx,5).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를 ‘파생적 의미에서’ 은혜의 방편이라 부를 수 있다. 칼빈은 기도를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III,xx,2)라 부르기도 한다.. “Est enim quaedam hominum cum Deo communicatio”, 297,31; “communication entre Dieu et nous”, Katechismus van 1537, Opera Selecta, 1, 404; in CR, 31, 69 on Ps. 5:8. Cf. H. Scholl은 칼빈에게서 기도가 지닌 이 교제의 성격을 강조한다, op. cit., 25-28.
이 점에서 우리는 ‘계시한다’는 말을 살피려고 한다. 그는 이 문맥에서 이 용어를 두 번이나 사용하는데, 이 말은 상당히 강한 표현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특성을 잘 들어내어 보인다. 이 점에서 기도는 은혜의 방편인 것이다.. Calvijn, III,xx,29.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이미 우리에게 주셔서 당신을 즐기게 하신다 (Deus se nobis fruendum in Christo dedit), in CR, 45, 69.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야 하며, 이 약속이 우리의 마음에 인을 쳐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 일어나는가? 바로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칼빈은 말한다.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심을 알게 된다.. “Or, en somme, quand nous faisons telles requestes, cest afin que les promesses de Dieu nous soyent tant plus certaines et tant mieux ratifiees· Or il est besoin quelle soit ratifiee et seellee en nos coeurs. Et comment? Par prieres et oraisons, que nous demandions à Dieu quil accomplisse ce quil nous a dit”, Qunzieme Sermon sur le Pseaume CXIX(v.115), in CR,  32, 659-660 (Samech).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써 기도해야 하며, 이런 기도는 우리를 우리 바깥으로 인도한다.”. Troisieme Sermon sur le Pseaume CXIX(v.20), in CR, 32, 512 (Gimel).
하나님과의 이 교제는 인간적인 경건의 표현이 아니며, 이 간절한 마음은 오직 말씀의 능력 아래 있다. “내가 말씀 위에 서 있을 때 나는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 Qautrieme Sermon sur le Pseaume CXIX(v.26), in CR, 32, 520 (Daleth).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를 가능하게 만드시는 영원한 중보자이시다. “중보자를 의뢰하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만이 기도할 수 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접붙여진 다음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 “Scimus enim et spiritum regenerationis et omnes gratias nobis conferri Christi beneficio. Deinde certum est, quum nihil omni ex parte absolutum a nobis prodeat, nihil posse gratum esse Deo sine venia, quam per Christum obtinemus. Ita fit ut nostra opera gratiae Christi odore perfusa, suamvem fragrantiam spirent coram Deo, alioqui foeteant.”, Commentarius in Epistolam ad Hebraeos, XIII,20, in CR, 45, 196.

       위에서 본 대로 루터와 칼빈은 기도를 교제로 보았으며, 이에 기초하여서 하나님의 계시로 보았다.. 교제로서의 기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W. Herrmann, Der Verkehr des Christen mit Gott im Anschluss an Luther dargestellt, Stuttgart-Berlin 71921, 46, 165. E. Brunner는 하나님은 기도 중에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을 주신다고 말한다, Dogmatik III, Zürich 1960, 364ff..
이들의 기도론에서는 그리스도가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

       물론 기도가 개혁자에게 중요한 주제였지만, 그들이 기도를 비로소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중세와 고대 교회에서도 기도가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루터에 의한 기도의 재발견”이라는 말은 지나친 감이 있다. Contra H.J. Luibl, Das Fremden Sprachgestalt, 3.
교회사를 통하여 기도에 대해서 많은 글들이 쓰여졌다. 이 중에서도 우리는 거의 무시당하였으나, 칼빈이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도가 지닌 계시의 성격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때 대개 기도는 계시된 말씀과 더불어 취급된다. 말씀은 하나님과의 교제인 기도를 통하여 기도 중에서 깨달아진다. 우리는 유스틴, 클레멘스 그리고 오리겐 등 고대교회의 세 명의 신학자들을 다루면서 이 점을 확인하려고 한다.
       먼저 유스틴을 살펴보자. 유대인 노인은 유스틴이 플라톤사상을 추종했다는 말을 들은 뒤에, 영혼이 신적인 존재와 닮았다는 이유로 불멸하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즉각 비판하였다. 도리어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제시하였고, 그분에게 인간의 생명이 의존하고 있임을 설파하였다. 이미 철학자들이 출현하기 전에 이 진리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성령으로 충만했던 의로운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되었다. 그 당시에도 존속하던 그들의 저작들은 논증(meta apodeixewj)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는 논증을 능가하며, 진리는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만물의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고,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예언하였다. 구약과 하나님 및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연결시킨 뒤에, 그 노인은 유스틴에게 권고하였다: “무엇보다도 기도하시오. 그러면 빛의 문들이 그대에게 열릴 것이요. 이런 것들은 만인이 파악하거나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요. 오직 하나님과 당신의 그리스도가 지혜를 베푸는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오.”. Justinus, Dialogus cum Tryphone Judaeo, 7, MPG 6, 492c.
진리의 깨달음에는 논증이 아니라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과, 기도의 의미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유스틴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해서였다. 이 것은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기도 사이에 있는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클레멘스는 그릇된 영지주의를 논박하면서 자신을 진정한 영지주의자로 불렀다. 그는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oJmiliva pro;" to;n qeo;n hJ eujch”” Clemens of Alexandria, Stromata, VII,7, MPG 9, 456A.
영지주의자는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도 중에서 추구한다. 이 목표가 성취되면, 그는 무의미한 모든 것을 떨쳐버린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과 함께 있기(suneinai men speudwn qew)를 갈구한다. 이로써 그는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완전함에 도달한다.. 456b-c.
그리고 나서 그는 마치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게 되는, 기도 생활에서 나타나는 자아 도취적인 자만을 경고한다. 비록 모든 선한 것들이 다 우리의 권리 주장 없이 다 은사로 주어지지만, 간구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덧 붙혔다.
       이제 영지주의자는 이웃이 신지식(神知識)에 이르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그들이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유일하게 선하신 구세주을 알게 되도록 기도할 수 있다. 클레멘스는 계속하여서 신앙은 기도의 한 형태라는 특이한 발언을 한다.. “Jam et gratiarum actio, et petitio eorum quae pertiment ad conversionem proximorum, est opus gnostici; qua quidem ratione oravit quoque Dominus, gratias quidem agens quod ministerium perfecerat: rogans autem ut ad cognitionem venirent quam plurimi, ut in iis qui salvi fiunt, per salutem ex agnitione Deus glorificetur (in en toij swzomenoij dia thj swthriaj kat epignwsiv o qeoj doxazhtai), et qui est solus bonuset qui solus Servator, per Filium ex saeculo in saeculum agnoscatur (epiginwuskhtai). Quin etiam fides qua quis credit accepturum esse se quod petit, quaedam precation est, in animo gnostice reposita”, 458b.  
다시 한번 더 그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다 기도로 승화된다면, 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기회를 피할 이유가 없다. 영지주의자의 거룩과 하나님의 완전하신 선하심은 상통한다. 회개한 자는 신앙과 지식과 그 위에 사랑의 완전을 간구한다. 이 사랑의 정상을 정복한 영지주의자는 영지적인 묵상(qewria)이 지속되고 성장될 것을 바라면서 기도한다.. 466b. Over qewria, Stromata, 2,10, MPG 8, 984b; 2,21, MPG 8, 1076c; 6,14, MPG 9, 329b; 7,3, MPG 9, 416c; 7,10, 480b.
지고의 선은 신지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거룩하고 경건하다. 영지주의자는 종국적으로 자신이 경건한 자임을 입증한다.. “Res est ergo maxima Dei cognitio: quocirca  eas quoque ita conservatur virtus ut amitti nequeat. Qui autem Deum novit est sanctus et pius; qui est ergo gnosticus, eum solum esse pium jam probatum est”, 468b.
경건한 영지주의자의 생애 전체는 잔치이다. “그의 제물은 기도요 찬양이요, 식사 전(前) 성경 읽기요, 식사 시와 취침 전 시편과 찬송이요 또 심야의 기도이다. 이를 통하여 그는 영원한 기억 중에서 묵상에 집중하면서 신적 찬양대에 합류한다.”. 496b.
물론 클레멘스는 기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기도가 지닌 대화의 성격을 그는 동시에 강조한다. 그리고 기도에 나타나는 ‘송영’의 측면도 함께 강조한다.
       이제 클레멘스가 지고선인 신지식과 교제를 어떻게 연관시키지는지를 살펴보자. 그에게는 이 지식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앎’, ‘하나님을 봄’ 또는 ‘하나님을 소유함’이라는 뜻을 지닌다.. ginwskein, Stromata, VI,14, MPG 9, 332a; epignwskein, Fuimus enim illuminati, id autem est Deum agnoscere, Paedagogus, I,6, MPG 8; cwrein, Stromata, VII,16, MPG 9, 544b.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고의 묵상이며, 이 때 말씀은 안내자가 되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천국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거룩한 신비에 들어가서 그 곳에 준비된 모든 것들을 즐길 것이다. 유일한 선은 성부이시며, 성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사망이고, 불멸한 이(부활의 주님)를 통하여 당신을 아는 것은 영생이다. 이 지식에서 벗어남은 곧 파멸이다. 불멸함은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et ligno alligatus, ab omni corruptione solutus eris, Gubernabit te Verbum Dei, et ad portum coelorum appellet Spiritus sanctus. Tum Deum meum intueberis, et sacris illis mysteriis initiaberis, et iis rebus frueris, quae in coelis recondita, quae mihi asservata sunt; kai tw xulw prosdedemenoj apashj esh thj fqoraj lelumenoj kubernhsei se o Logoj o tou Qeou kai toij limesi kaqormisei twn ouranwn to Pneuma to agion Tote mou katopteuseij ton Qeon kai toij agioij ekeinoij telesqhsh musthrioij kai twn en ouranoij apolauseij apokekrummenwn twn emoi tethrhmenwn a oute ouj hkousen oute epi kardian anebh tinoj", Cohortation ad Gentes, 12, MPG 8, 240a; "zwh aiwnioj kata metousian thj tou afqartou dunamewj. kai to mh fqeiresqai qeiothtoj metecein esti, Stromata, II,10, MPG 9, 97a.
따라서 이 지식은 결코 지성주의적으로 채색되어져 있지 않다.
       위에서 나타나는 대로, 클레멘스는 신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연관시킨다. 그리고 이 지식은 인간의 신격화를 향한 길이다.. Cohortatio ad Gentes, XI, M 8, 233a.
이 본문은 교회사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인간의 신격화에 관한 언급이다. 인간의 신격화는 성자를 통하여 참되게 입양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를 하나님은 아들과 신이라 부르신다.. “quocirca eos etiam qui ipsum agnoverunt, appellat filios et deos”, Stromata, VI,16, MPG 9, 377a.
이처럼 기도와 신지식, 그리고 신격화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오리겐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 119:8)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기도와 성경 이해의 관계를 아주 멋지게 표현한다. 율법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으면, 선지자들이 기도하였듯이 우리도 깨닫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opou ecomenoi peri tou nomou wj asfouj kai deomenou Qeou ina nohqh legousinen euch”, Contra Celsum, II,6, MPG 11, 804b; cf. IV,50.
물론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가 성경을 깨닫는 데에 기도를 관련시킨 것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오리겐은 기도의 단계를 서술한다. 먼저는 비록 영적이지만 제한적인 것을 간구함이요(dehsij), 그 다음은 하나님과의 순수한 교제 중에서 우리 자신을 바침이요(proseuch), 마지막은 기도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들어내는 송영이다(docologi,a).. Libellus de oratione, XIV, MPG 11, 460c-461a; cf. XV,1.
이 송영의 단계에서는 하나님과의 합일 (enwsij)이 강조된다. 물론 여기서도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 구별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기도의 가장 최고봉으로서 송영이 언급되어 있다. 이 것은 사심 없는 기도라 할 수 있다. 송영에서 기도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지향한다. 신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높이 고양되며, 이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그는 사소한 것을 간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가치한 축복을 구하지 않고, 크고 신적인 것을 구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사,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당신에게만 있는 구원을 얻게 한다.. Contra Celsum, VII,44, MPG 11, 1484c.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중심 역할을 한다. 예수님 안에서 신적인 것과 인적인 것이 연합하여서 인간은 그 분 안에서 신적인 것과 교제하여 신적으로 된다. 바로 이런 삶을 예수님이 사셨고,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서 사는 모든 자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을 누리게 된다.. "quippe qui hinc discunt ab illo incoepisse divinae naturae cum humana conjunctionem (koinwnia); ut humana sua cum re diviniori societate fieret divina non in solo Jesu, sed et in omnibus, qui cum fide vitam amplectuntur quam Jesus edocuit, et quae ad amicitiam Dei ejusque communionem (koinwnia) perducit quicunque suos mores ex Jesu praeceptis composuerint", Contra Celsum, III,28, MPG 11, 956c; cf. III,37; De Principiis, I,6,6.
오리겐은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에게 성경 읽기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두드리고 찾는 데에만 만족하지 말라.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지식에서 불가피하다. 구주께서도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권하신다. .. 그대가 동참자가 되고 그대의 기업이 날로 번성하여 그리스도께만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도 참여하기를 원한다.”. Origenes, Epistola ad Gregorium, 3, MPG 11, 92a-b.
그리고 이는 기도 생활에서 이루어진다.
       오리겐은 간구나 사죄 기도보다는 삼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더 강조한다. 기도에서 제일 먼저 송영이 나오고 그 다음이 하나님의 은덕에 관한 감사이다. 셋째는 사죄 기도요 마지막이 간구이다. 그리고 기도는 다시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리는 송영으로 마쳐야 한다.. "Pro viribus in principio atque exordio orationis gloria reddenda est Deo per Christum conglorificatum in sancto Spiritu collaudato; kata dunamin doxologiaj en th arch kai tw prooimiw thj euchj lekteon tou Qeou dia Cristou sundoxologoumenou en tw agiw Pneumati sunumnoumenw. kai epi pasi tn euchn eij doxologian qeou dia Cristou en agiw pneumati katapausteon", Libellus de oratione, 33, MPG 11, 557b.
비록 삼위일체론이 오리겐에게는 여전히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지만, 기도는 삼위를 향한 송영으로 시작하여 삼위를 향한 송영으로 마쳐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물이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오듯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삼위 안에 있는 삶이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Bouyer, Spirituality of the New Testament and the Fathers (Wellwood: Burns & Oates, 1963), 299.
오리겐은 책을 쓰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이것은 나중에 힐라리나 어거스틴에게서도 나타난다.. "invocato per Christum Deo; (euxamenoi dia Cristou tw Qew)", Contra Celsum, IV,1, MPG 11, 1027c.

       유스틴, 클레멘스 그리고 오리겐에게서 기도는 기록된 말씀을 이해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신앙에 이른다. 기도로써 말씀을 이해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른다. 기도의 또 다른 기능은 신비적 경향인데, 하나님과의 합일을 지향한다. 이 측면이 제 아무리 위험하다 하더라도 기도가 지닌 이러한 교제적 성격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기도는 인간의 자세, 즉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도의 내용은 부차적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기도가 주로 간구로만 이해되었었다.. K.Ch. Felmy, Die Orthodoxe Theologie der Gegenwart: eine Einführung, Darmstadt 1990, 128.
그러나 특히 루터에게서 본 대로 개혁자들은 기도에서 간구보다는 경배의 측면을 더 부각시켰다. 이 것은 바로 삼위 하나님을 향한 찬양, 곧 송영이다. 송영을 우리는 기도의 최고봉이라 부르려고 한다.. L. Sertorius, 'Orthodoxe Theologie im 20. Jahrhundert', in H. Vorgrimler & R. Vander Gucht, ed., Bilanz der Theologie II, Freiburg 1969, 155; “I would even mention a tension between theology and prayer. Doeing theology, and especially doing dogmatics demands prayer. Not in this way, that in our prayers we switch off theological reasoning, and even less that in our dogmatic reasoning we forget prayer. Calvin provides a lasting example of a theology in which prayer, and even doxology, is integrated. He was Augustines disciple in this respect, too. A difference between this and theological concepts of our age in which prayer is not a real meeting-place in faith with the triune God”, J.W. Maris, “The Vitality of Reformed Dogmatics Challenged”, in. J.M. Batteau, J.W. Maris & K. Veling, ed., The Vitality of Reformed Theology (Kampen: Kok, 1994), 61.


       우리는 기도의 구조를 신학의 구조로 발전시키려고 한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언설이다. 그러나 신학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물건이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 인격이시다. 신학의 대상은 동시에 그 주체이다. 하나님은 주체로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신지식이란 우리와 교제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모종의 정보를 얻기 위하여 추적하는 탐사자의 입장에서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상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주체로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치면,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이것을 우리는 기도에서 잘 살펴보았다. 우리는 기도 중에 대상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만난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교제라 할 수 있다.. H. Benckert, "Das Gebet als Gegenstand der Dogmatik", Evangelische Theololgie, Vol. 5, 1955, 544; M. Plathow, "Geist und Gebet", Kerygma und Dogma, Vol. 29, 1983, 50.
기도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면서 동시에 하나님도 우리에게로 오셔서 당신을 삼위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즉 기도는 이와 같이 은혜의 방편이다. “기도는 여타 종교적 행위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의 총체가 기도에서 이루어진다.”. G. Ebeling, Dogmatik des christlichen Glaubens I, Tübingen, 1979, 192-210, 인용은 208.
신학은 대화와 교제라는 기도의 구조를 채용할 수 있다. 우리는 쉬임 없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그 분이 누구신지를 먼저 그 분으로부터 듣고 배워야 한다. “신학은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에서 마친다. 교회는 신학을 언설하기 전에 먼저 기도한다.”. D.E. Saliers, "Theology and Prayer", Worship, Vol. 48, 1974, 230.
하나님과 쉬임 없이 교제하는 기도의 구조가 신학의 구조가 되어야 한다.
       송영은 기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송영은 성경에서 종종 이인칭의 형태로 언설된다 (마 6:13). 그러나 대개 삼인칭의 형태로 많이 나타난다 (창 14:20; 눅 2:14; 오 11:36 이하).. A. Stuiber, "Doxologie", in Reallexikon für Antike und Christendum, 4, Stuttgart 1959, 212.
송영에서 하나님은 이인칭 ‘당신’에서 삼인칭 ‘그’로 호칭되고, 때로는 ‘나’와 교중의 ‘우리’는 사라지면서, 하나님 만이 전부가 되신다. 아주 강하게 객관적으로 등장하는 이 표현은 사실 객관적 표현이 아니라 엄격하게 말하자면 ‘자기 부인’이요, ‘자기 제사’이다. “송영에서 ‘나’는 제물로 바쳐졌다. 사실 송영은 찬미 제물이요 자기 포기이다.”. E. Schlink, Ökumenische Dogmatik: Grundzüge, Göttingen 1983, 35; G. Hasenhüttl, Einführung in die Gotteslehre, Darmstadt 1980, 240-241. “신학은 영적이고 지성적인 찬송의 방식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제사드림이다……. 또 신학의 목적은 인간적 지혜의 변증도, 이단에 대한 대답도, 우리 신앙과 생각을 고백적으로 기술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합리적인 감사제물이다”, L. Sertorius, art. cit., 155. 우리의 찬송 204장 3절의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도 이에 해당되는 송영이다.

       송영은 하나님이 이미 가지신 영광을 찬송함이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가지고 계시나, 우리에게 나타난 그분의 영광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찬송함이 송영이다. 야곱의 총애를 받지 못한 레아는 네째 아들을 낳고서 비로소 그의 이름을 유다, “내가 이제는 야웨를 찬송하리로다”(창 29:35)고 고백했다. 물고기 뱃 속에서 요나는 “나는 감사(찬송)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야웨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라고 고백했다. 특히 시편에는 이런 송영이 더욱 빈번하게 나온다(시 28:6, 31:23, 66:20, 72:19, 144:1 이하). 하나님의 구체적 구원 행위를 감사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송영이 터져 나온다(출 18:9 이하; 룻 4:14; 시 103:8; 슥 11:5). 송영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구원의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상, 딤전 1:17, 계 7:12). 송영은 삼위의 구원사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의 삼위 하나님을 찬양함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의 거룩한 제단에 감사의 제물을 영원토록 드리리이다, 오 성부여, 로고스여, 성령이시여.”. “illic quoque tibi fortasse super altari tuo sancto grata sacrificia offeremus, o Pater, et Verbum, et Spiritus sancte. Quia tibi debetur omnis gloria, honor, et imperium, in saecula saeculorum. Amen”, Nazianzus, Oratio, XLV,30, MPG 36, 664b-c.
이와같이 송영에서 신학과 경륜이 연합한다. 나아가 이런 본문들에서는 구원 행위 전이나 후에도 하나님은 여상하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심을 찬송한다(창 24:27; 삼하 18:28; 왕상 1:48, 5:7; 대상 29:10 이하; 에스라 7:27-28; 시 119:12 이하, 144:1 이하; 눅 1:68; 고후 1:3; 벧전 1:3). 또 구원의 하나님이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이심을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의 사역에서 당신의 위엄, 지혜, 선하심과 은총을 계시하신다(시 8:2, 104:2-3, 148편; 계 4:11). 그러므로 창조와 우리가 지은 바 된 순간부터 삶의 의의와 목적은 찬송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웨를 찬양할찌어다”(시 150:6). 송영은 창조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속하며(마 6:13), 이 나라 백성의 임무는 찬송이다(시 47:7-8). 이처럼 송영에서는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우리의 경배 앞에 현현한다. 예수님에 관한 이런 관점에서 송영도 나타난다(롬 9:5).
       우리는 신학이 송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W. Brueggemann, Israel's Praise: Doxology against Idolatry and Ideology (Philademphia: Fortress Press, 1989); T. Berger, Theology in Hymnen?: Zum Verhältnis von Theologie und Doxologie am Beispiel der 'Collection of Hymns for the Use of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1730), Altenberge 1989; J. Drumm, Doxologie und Dogma, Paderorn 1991.
신학은 찬미의 제사여야 한다(히 13:15). 성경의 계시는 이성으로만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을 지니고 있다. “전체적인 예배는 영적 차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신학적 반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기도의 법은 믿음의 법이다.”. R, Schnackenburg, Der Brief an die Epheser, in EKK X, 1982, 160; cf. R.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100; D. Ritschl, Zur Logik der Theologie, München 21988, 110ff, 329-338.
학은 학이로되 학만이 아닌 지혜요, 또 이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이성만으로는 벌거숭이가 될 수밖에 없는 로고스(Logoj), 이것이 신학의 길이다. 이성은 신비와 지혜의 영역 안에서 자기를 실현한다. 즉 이성이 자기를 신앙 안에서의 합리성으로 이해할 때 신학의 신학적 특징이 드러난다. “삼위일체론은 궁극적으로는 사고의 방식으로 드리는 송영이다.. H. Thielicke, Der evanglische Glaube II: Gotteslehre und Christologie, Tübingen 1973, 208.
”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를 우리는 힐라리와 어거스틴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저작 「삼위일체론」을 삼위 하나님을 향한 송영으로 마친다. “주께 간구하오니, 저의 이 경건한 신앙이 더러워지지 않게 지켜주소서. 제 영혼이 떠나갈 때라도 이 것이 내 확신의 말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던 때의 중생의 고백에서 말한 바를 영원토록 지키게 하소서. 폐일언하고 저로 하여금 우리 아버지이신 당신과 동시에 당신의 아들을 찬양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동생자를 통하여 당신의 성령의 은총을 입게 하소서. ‘아버지여,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니다’고 말씀하시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신앙의 증인이시니, 그는 당신 안에 당신과 계시며 영원토록 축복받으실 하나님이시이니다.”. “Conserva, oro, hanc fidei meae incontaminatam religionem, et usque ad excessum spiritus mei dona mihi hanc conscientiae meae vocem: ut quod in regenerationis meae Symbolo, baptzatus in Patre et Filio et Spiritu sancto, professus sum, semper obtinema: Patrem scilicet te nostrum, Filium tuum una tecum adorem: sanctum Spirutum Tuum, qui ex te per ungenitum tuum est, promerear. Quia mihi idoneus ad fidem testis est, dicen: Pater, omnia mea tua usnt, et tuam mea (Joan. XVII,10), Dominus meus Jesus Christus, manens in te et ex te et apud te semper Deus: qui est benedictus in saecula saeculorum. Amen.”, Hilarius, De Trinitate, XII,57, MPL 10, 472a.
“우리는 쉬임 없이 오직 한 분이신 당신을 찬양하면서 한가지만을 말하리이다. 우리는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 주님 홀로 한 분이시요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이시여, 제가 이 책에서 말한 것은 당신에게서 왔아오니, 저들이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의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당신께서 용서하여 주소서. 아멘.”. “et sine fine dicemus unum laudantes te in unum, et in te facti eitam nos unum. Deomne Deus une, Deus Trinitas, quaecumque dixi in his libris de tuo, agnoscat et tui: si qua de meo, et tu ignosce, et tui. Amen.”, Augustinus, De Trinitate, XV,51, MPL 42, 1098.
신학은 신비를 장악할 수 없다. 도리어 그 신비의 끝없는 깊이를 노래할 뿐이다. 신학은 곧 송영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3-35) 이는 知的인 否定 신학이 아니라, 자기 포기의 송영이다.
       신학은 송영이요, 신학은 송영으로 시작하여 송영으로서 마쳐야 한다. 교의학은 종말론으로 마칠 것이 아니라, 송영으로 마치는 것이 더 아름답다. 이처럼 모든 신학저서들이 하나 같이 삼위 하나님을 향한 송영으로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신학연구와 설교에는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는 기도의 자세가 선행해야 한다. 신학자가 신학을 말씀과 기도로써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신앙을 송영으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에서 나타나듯이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성경말씀에 의탁할 때에만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기도가 어쨌든 모든 신지식의 방편인 것처럼 기도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의 방편이다.”. C. Stange의 말을 M. Riemer, Schriftauslegung und Gebet, Gütersloh 1927, 26에서 재인용.
복음 사역에 있어서 기도는 설교보다 결코 경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교중을 향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고 요청하였다. 고대교회에서는 신학이 기도로 흥왕하였고, 캅바도기아 신학자들이나 힐라리 및 어거스틴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신학은 묵상으로 수행되었다.. A.G. Hamman, La prière dnas léglise ancienne, DT. A. Spoerri, Das Gebet in der Alten Kirche, Bern-Frankfurt am Main-New York-Paris 1989, XL.
“기도는 신앙의 시금석이요 기도의 신학은 모든 신학의 시금석이다.”. E. Brunner, Dogmatik III, Zürich 1960, 368.

       우리는 루터가 세 용어로써 요약한 신학의 방법을 언급함으로써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기도, 묵상, 추구.”. Luther, Vorrede zum 1. Band der Wittenberger Ausgabe, 1539, in WA, 50, 659-661; cf. O. Bayer, Theologie, Gütersloh 1994, 55-105; idem, “Wer ist Theologe”, in M. Beintker, u.a., ed., Rechtfertigung und Erfahrung, München-Gütersloh, 1995, 209; 유해무, 「개혁교의학」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41-42.
신학은 송영이며, 신학은 기도로써 시작되고 수행되며 완성된다. “기도의 법은 신앙의 법을 구성한다.”. Prosper of Aquitanien ( -455), De gratia Dei indiculus, 8, MPL 51, 209. Verder zie, Walter Dürig, "Zur Interpretation des Axioms 'Legem credendi lex statuat supplicandi'", in A. Ziegenaus, F. Courth, ed., Veritati Catholicae: Festschrift für Leo Scheffczyk zum 65 Geburtstag, Pattloch Verlag 1985, 226-236; M.M. Garijo-Guembe, "Überlegungen für einen Dialog zwischen Orthodoxie und Katholizismus im Hinblick auf den Satz 'Lex orandi-lex credendi'", in K. Richter, ed., Liturgie: ein Vergessenes Thema der Theologie?, Freiburg-Basel-Wien 1986, 128-152.



약어표
CR        Corpus Reformatorum. Halle 1834ff.
MPG        Patrologia cursus completus, Series Graeca, accurante J.-P. Migne. Paris 1857-66.
MPL        Patrologia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accurante J.-P. Migne. Paris 1841-64.
WA        M. Luthers Werke. ㅇ.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er Lutherausgabe. Weimar Weimar-Köln-Tübingen 1883ff.
(I,i,1)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59).  제 1권 제 1장 제 일절.
1. “Si theologus es, vere orabis, sique vere oraveris, es theologus (Ei qeologoj ei proseuxh
alhqwj kai ei alhqwj proseuxh qeologoj ei)”, Euagrius, De oratione, lx, MPG 79, 1179b.
2. De Quervain, Das Gebet, Zollikon-Zürich 1948, 13. Thurneysen, Die Lehre von der Seelsorge, 1946.
3. H. Berkhof, Christelijk Geloof, 483; L. Doekes, 'Het gebed in de gereformeerde dogmatiek na Calvijn', in C. Trimp, ed., De biddende kerk, Groningen 1979, 43-83.
4. F. Schleiermacher, Predigten, I, 24.
5. P. Althaus, Zur Charakteristik der evangelischen Gebetsliteratur im Reformationsjahrhundert, 1914, 4. 로마교신학자 K. Heiler는 종교사적이며 종교심리학적 관점에서 기도에 관한 큰 부피의 책을 썼으며, 그 또한 경건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Das Gebet, Katholischer und evangelischer Gottesdienst, München 1921.
6. 구약에서는 Henning Graf Reventlow의 Gebet im Alten Testament, Stuttgart-Berlin- Köln-Mainz 1986, 신약에서는 Oscar Cullmann, Das Gebet im Neuen Testament, Tübingen 1994이 대표적이 예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기도의 이해에 관한 학위 논문들도 있다. 칼빈에 대해서는 Hans Scholl, Dienst des Gebetes nach Johannes Calvin, Stuttgart 1968, 루터에 대해서는 스웨덴의 신학자인 Gunnar Wertelius, Oratio Continua: das Verhältnis zwischen Glaube und Gebet in der Theologie Martin Luthers, Lund 1970, 그리고 멜랑톤에 대해서는 Martin H. Jung이 아주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다, Frömmigkeit und Theologie bei Philipp Melanchthon: das Gebet im Leben und in der Lehre des Reformators, Tübingen 1998.
7.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116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8문답.
8. “복음 사역에서 기도는 설교에 뒤지지 않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없는 자는 완전한 사역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에게 전달되어야 하고, 인간의 일은 하나님 앞에 전달되어야 한다”, J.A. Bengel, Gnomen Novi Testamenti, Tubingae 1855, 451 (행 8:15)
9. "durch die predig kompt er herab, sso kommen wir durch den glawben hynauff", Auff des Euangelion Marci am lezten, in Predigten des Jahres 1523, in WA, 12, 565, 20-21; "denn das unser lieber Herr selbs mit uns rede durch sein heiliges Wort, und wir widerumb mit jm reden durch Gebet und Lobgesang", Predigten des Jahres 1544, in WA 49, 588, 16-18.
10. “denn gegen Gott konnen wir nicht mehr handeln denn auff zwo weise, nemlich, mit dancken und biten, Mit dem danck, ehren wir jhn umb die guter und gnaden, die wir schon bereit empfangen haben, Mit dem beten ehren wir jhn umb die guter und gnaden, die wir hinfurt gerne hetten, · Das ist sacrifcium laudis et sacrificium orationis”, Vermahnung zum Sakrament des Leibes und Blutes Christi, in WA 30/2, 622, 35-623,3.
11. V. Vajta, Die Theologie des Gottesdienstes bei Luther, Stockholm 1952 (21954), 296.
12. Von dem Gebete, in WA 30/1, 193,16ff, 195, 30ff. 칼빈에 대해서는 H. Scholl, 36-38을 보라.
13. Ein Sermon von dem Gebet und Procession in der Kreuzwoch, 1519, in WA 2, 175, 12ff.
14. Vajta, op. cit., 300.
15. “Der ist unsser alltar, auff dem wyr geopffert sind, auff der wolthatt mussen wyr dancken und darynnen beten”, Adventspostille 1522 (Phil. 4:4-7), in WA 10/2, 184,18; “altare nostrum est Christus, ipse sacerdos et hostia et altare nostrum, super quem nos impositi offerimur deo patri, et in ipso omnia nostra sacrificai offerimus”, Dictata super Psalterium, 1513-1516 (LXXXIII), in WA 3, 646, 13ff.
16. “Hoc postea nobis explicatum est, Dominum sese ultro ac liberaliter in Christo suo exhibere, in quo pro nostra miseria omnem foelicitatem, pro nostra inopia opulentiam offert”, Opera selecta, IV, 297,1-3
17. “qua denique totum ipsum, ut se nobis praesentem exhibeat accersimus”, Opera selecta, IV, P. Barth & G. Niesel, ed., 298,8-9.
18. “Est enim quaedam hominum cum Deo communicatio”, 297,31; “communication entre Dieu et nous”, Katechismus van 1537, Opera Selecta, 1, 404; in CR, 31, 69 on Ps. 5:8. Cf. H. Scholl은 칼빈에게서 기도가 지닌 이 교제의 성격을 강조한다, op. cit., 25-28.
19. Calvijn, III,xx,29.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이미 우리에게 주셔서 당신을 즐기게 하신다 (Deus se nobis fruendum in Christo dedit), in CR, 45, 69.
20.“Or, en somme, quand nous faisons telles requestes, cest afin que les promesses de Dieu nous soyent tant plus certaines et tant mieux ratifiees· Or il est besoin quelle soit ratifiee et seellee en nos coeurs. Et comment? Par prieres et oraisons, que nous demandions à Dieu quil accomplisse ce quil nous a dit”, Qunzieme Sermon sur le Pseaume CXIX(v.115), in CR,  32, 659-660 (Samech).
21. Troisieme Sermon sur le Pseaume CXIX(v.20), in CR, 32, 512 (Gimel).
22. Qautrieme Sermon sur le Pseaume CXIX(v.26), in CR, 32, 520 (Daleth).
23. “Scimus enim et spiritum regenerationis et omnes gratias nobis conferri Christi beneficio. Deinde certum est, quum nihil omni ex parte absolutum a nobis prodeat, nihil posse gratum esse Deo sine venia, quam per Christum obtinemus. Ita fit ut nostra opera gratiae Christi odore perfusa, suamvem fragrantiam spirent coram Deo, alioqui foeteant.”, Commentarius in Epistolam ad Hebraeos, XIII,20, in CR, 45, 196.
24. 교제로서의 기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W. Herrmann, Der Verkehr des Christen mit Gott im Anschluss an Luther dargestellt, Stuttgart-Berlin 71921, 46, 165. E. Brunner는 하나님은 기도 중에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을 주신다고 말한다, Dogmatik III, Zürich 1960, 364ff..
25. 그러므로 “루터에 의한 기도의 재발견”이라는 말은 지나친 감이 있다. Contra H.J. Luibl, Das Fremden Sprachgestalt, 3.
26. Justinus, Dialogus cum Tryphone Judaeo, 7, MPG 6, 492c.
27. “oJmiliva pro;" to;n qeo;n hJ eujch”” Clemens of Alexandria, Stromata, VII,7, MPG 9, 456A.
28. 456b-c.
29. “Jam et gratiarum actio, et petitio eorum quae pertiment ad conversionem proximorum, est opus gnostici; qua quidem ratione oravit quoque Dominus, gratias quidem agens quod ministerium perfecerat: rogans autem ut ad cognitionem venirent quam plurimi, ut in iis qui salvi fiunt, per salutem ex agnitione Deus glorificetur (in en toij swzomenoij dia thj swthriaj kat epignwsiv o qeoj doxazhtai), et qui est solus bonuset qui solus Servator, per Filium ex saeculo in saeculum agnoscatur (epiginwuskhtai). Quin etiam fides qua quis credit accepturum esse se quod petit, quaedam precation est, in animo gnostice reposita”, 458b.  
30. 466b. Over qewria, Stromata, 2,10, MPG 8, 984b; 2,21, MPG 8, 1076c; 6,14, MPG 9, 329b; 7,3, MPG 9, 416c; 7,10, 480b.
31. “Res est ergo maxima Dei cognitio: quocirca  eas quoque ita conservatur virtus ut amitti nequeat. Qui autem Deum novit est sanctus et pius; qui est ergo gnosticus, eum solum esse pium jam probatum est”, 468b.
32. 496b.
33. ginwskein, Stromata, VI,14, MPG 9, 332a; epignwskein, Fuimus enim illuminati, id autem est Deum agnoscere, Paedagogus, I,6, MPG 8; cwrein, Stromata, VII,16, MPG 9, 544b.
34. “et ligno alligatus, ab omni corruptione solutus eris, Gubernabit te Verbum Dei, et ad portum coelorum appellet Spiritus sanctus. Tum Deum meum intueberis, et sacris illis mysteriis initiaberis, et iis rebus frueris, quae in coelis recondita, quae mihi asservata sunt; kai tw xulw prosdedemenoj apashj esh thj fqoraj lelumenoj kubernhsei se o Logoj o tou Qeou kai toij limesi kaqormisei twn ouranwn to Pneuma to agion Tote mou katopteuseij ton Qeon kai toij agioij ekeinoij telesqhsh musthrioij kai twn en ouranoij apolauseij apokekrummenwn twn emoi tethrhmenwn a oute ouj hkousen oute epi kardian anebh tinoj", Cohortation ad Gentes, 12, MPG 8, 240a; "zwh aiwnioj kata metousian thj tou afqartou dunamewj. kai to mh fqeiresqai qeiothtoj metecein esti, Stromata, II,10, MPG 9, 97a.
35. Cohortatio ad Gentes, XI, M 8, 233a.
36. “quocirca eos etiam qui ipsum agnoverunt, appellat filios et deos”, Stromata, VI,16, MPG 9, 377a.
37. “opou ecomenoi peri tou nomou wj asfouj kai deomenou Qeou ina nohqh legousinen euch”, Contra Celsum, II,6, MPG 11, 804b; cf. IV,50.
38. Libellus de oratione, XIV, MPG 11, 460c-461a; cf. XV,1.
39. Contra Celsum, VII,44, MPG 11, 1484c.
40. "quippe qui hinc discunt ab illo incoepisse divinae naturae cum humana conjunctionem (koinwnia); ut humana sua cum re diviniori societate fieret divina non in solo Jesu, sed et in omnibus, qui cum fide vitam amplectuntur quam Jesus edocuit, et quae ad amicitiam Dei ejusque communionem (koinwnia) perducit quicunque suos mores ex Jesu praeceptis composuerint", Contra Celsum, III,28, MPG 11, 956c; cf. III,37; De Principiis, I,6,6.
41. Origenes, Epistola ad Gregorium, 3, MPG 11, 92a-b.
42. "Pro viribus in principio atque exordio orationis gloria reddenda est Deo per Christum conglorificatum in sancto Spiritu collaudato; kata dunamin doxologiaj en th arch kai tw prooimiw thj euchj lekteon tou Qeou dia Cristou sundoxologoumenou en tw agiw Pneumati sunumnoumenw. kai epi pasi tn euchn eij doxologian qeou dia Cristou en agiw pneumati katapausteon", Libellus de oratione, 33, MPG 11, 557b.
43. L. Bouyer, Spirituality, 299.
44. "invocato per Christum Deo; (euxamenoi dia Cristou tw Qew)", Contra Celsum, IV,1, MPG 11, 1027c.
45. K.Ch. Felmy, Die Orthodoxe Theologie der Gegenwart: eine Einführung, Darmstadt 1990, 128.
46. L. Sertorius, 'Orthodoxe Theologie im 20. Jahrhundert', in H. Vorgrimler & R. Vander Gucht, ed., Bilanz der Theologie II, Freiburg 1969, 155; “I would even mention a tension between theology and prayer. Doeing theology, and especially doing dogmatics demands prayer. Not in this way, that in our prayers we switch off theological reasoning, and even less that in our dogmatic reasoning we forget prayer. Calvin provides a lasting example of a theology in which prayer, and even doxology, is integrated. He was Augustines disciple in this respect, too. A difference between this and theological concepts of our age in which prayer is not a real meeting-place in faith with the triune God”, J.W. Maris, “The Vitality of Reformed Dogmatics Challenged”, in. J.M. Batteau, J.W. Maris & K. Veling, ed., The Vitality of Reformed Theology (Kampen: Kok, 1994), 61.
47. H. Benckert, "Das Gebet als Gegenstand der Dogmatik", Evangelische Theololgie, Vol. 5, 1955, 544; M. Plathow, "Geist und Gebet", Kerygma und Dogma, Vol. 29, 1983, 50.
48. G. Ebeling, Dogmatik des christlichen Glaubens I, Tübingen, 1979, 192-210, 인용은 208.
49. D.E. Saliers, "Theology and Prayer", Worship, Vol. 48, 1974, 230.
50. A. Stuiber, "Doxologie", in Reallexikon für Antike und Christendum, 4, 1959, 212.
51. E. Schlink, Ökumenische Dogmatik: Grundzüge, Göttingen 1983, 35; G. Hasenhüttl, Einführung in die Gotteslehre, Darmstadt 1980, 240-241. “신학은 영적이고 지성적인 찬송의 방식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제사드림이다……. 또 신학의 목적은 인간적 지혜의 변증도, 이단에 대한 대답도, 우리 신앙과 생각을 고백적으로 기술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합리적인 감사제물이다”, L. Sertorius, art. cit., 155. 우리의 찬송 204장 3절의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도 이에 해당되는 송영이다.
52. “illic quoque tibi fortasse super altari tuo sancto grata sacrificia offeremus, o Pater, et Verbum, et Spiritus sancte. Quia tibi debetur omnis gloria, honor, et imperium, in saecula saeculorum. Amen”, Nazianzus, Oratio, XLV,30, MPG 36, 664b-c.
53. W. Brueggemann, Israel's Praise: Doxology against Idolatry and Ideology (Philademphia: Fortress Press, 1989); T. Berger, Theology in Hymnen?: Zum Verhältnis von Theologie und Doxologie am Beispiel der 'Collection of Hymns for the Use of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1730), Altenberge 1989; J. Drumm, Doxologie und Dogma, Paderorn 1991.
54. R, Schnackenburg, Der Brief an die Epheser, in EKK X, 1982, 160; cf. R.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100; D. Ritschl, Zur Logik der Theologie, München 21988, 110ff, 329-338.
55. H. Thielicke, Der evanglische Glaube II: Gotteslehre und Christologie, Tübingen 1973, 208.
56. “Conserva, oro, hanc fidei meae incontaminatam religionem, et usque ad excessum spiritus mei dona mihi hanc conscientiae meae vocem: ut quod in regenerationis meae Symbolo, baptzatus in Patre et Filio et Spiritu sancto, professus sum, semper obtinema: Patrem scilicet te nostrum, Filium tuum una tecum adorem: sanctum Spirutum Tuum, qui ex te per ungenitum tuum est, promerear. Quia mihi idoneus ad fidem testis est, dicen: Pater, omnia mea tua usnt, et tuam mea (Joan. XVII,10), Dominus meus Jesus Christus, manens in te et ex te et apud te semper Deus: qui est benedictus in saecula saeculorum. Amen.”, Hilarius, De Trinitate, XII,57, MPL 10, 472a.
57. “et sine fine dicemus unum laudantes te in unum, et in te facti eitam nos unum. Deomne Deus une, Deus Trinitas, quaecumque dixi in his libris de tuo, agnoscat et tui: si qua de meo, et tu ignosce, et tui. Amen.”, Augustinus, De Trinitate, XV,51, MPL 42, 1098.
58. C. Stange의 말을 M. Riemer, Schriftauslegung und Gebet, Gütersloh 1927, 26에서 재인용.
59. A.G. Hamman, La prière dnas léglise ancienne, DT. A. Spoerri, Das Gebet in der Alten Kirche, Bern-Frankfurt am Main-New York-Paris 1989, XL.
60. E. Brunner, Dogmatik III, Zürich 1960, 368.
61. Luther, Vorrede zum 1. Band der Wittenberger Ausgabe, 1539, in WA, 50, 659-661; cf. O. Bayer, Theologie, Gütersloh 1994, 55-105; idem, “Wer ist Theologe”, in M. Beintker, u.a., ed., Rechtfertigung und Erfahrung, München-Gütersloh, 1995, 209; 유해무, 「개혁교의학」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41-42.
62. Prosper of Aquitanien ( -455), De gratia Dei indiculus, 8, MPL 51, 209. Verder zie, Walter Dürig, "Zur Interpretation des Axioms 'Legem credendi lex statuat supplicandi'", in A. Ziegenaus, F. Courth, ed., Veritati Catholicae: Festschrift für Leo Scheffczyk zum 65 Geburtstag, Pattloch Verlag 1985, 226-236; M.M. Garijo-Guembe, "Überlegungen für einen Dialog zwischen Orthodoxie und Katholizismus im Hinblick auf den Satz 'Lex orandi-lex credendi'", in K. Richter, ed., Liturgie: ein Vergessenes Thema der Theologie?, Freiburg-Basel-Wien 1986, 128-152.
2007/04/16 20:33 2007/04/16 20:33
설교자로서 목회자
Ministry, (2007/04/16 20:32)
강연 제목을 '목회자와 설교'라 하지 않고 '설교와 목회자'라고 잡은 것은 의도적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 있다면 설교자로서의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의 일을 감당하면서 일차적으로 위탁받은 사명은 '말씀의 선포자'로서 입니다.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목사로서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자'(minister of the Word and sacraments)로서 안수 받는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선포자'(proclaimer of the Word)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요 명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의 위탁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종들이 이 사명을 성실하게, 충성스럽게 그리고 신실하게 수행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온전하게, 풍성하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전체의 선포자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중의 하나는 Sola Scriptura가 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과 좋은 쌍을 이루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평행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Tota Scriptura입니다. 그 뜻은 '전체 성경으로'란 뜻입니다. 전자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오직 성경 안에서만 드러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성경의 일부분만 살펴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전체의 흐름과 맥락 아래서 각 부분들이 이해되어지고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드러난(계시된) 뜻의 결집체로서의 '성경 전체'에 관해 일관성 있는 전망과 해석체계를 수립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자


이것은 다음과 같이 수많은 질문들, 그러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들을 제기하게 됩니다. 성경은 도대체 어떠한 종류의 문헌인가? 무엇을 이루기 위한 의도로 저술된 책인가? 성경의 일차적 저자와 이차적 저자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성경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된 신학적 흐름이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다양한 신학들과 전통들의 결집체인가? 서로 다른 양식들, 예를 들어 시, 역사, 이야기, 잠언, 비유, 예언, 신탁, 기도 등 다양한 문학적 장르를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각권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다루어야 하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해석의 방법론이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엄청난 거리를 갖고 있는 '성경의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 성경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조건화, 혹은 상황화 되어진 책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어느 정도까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제한되고 한정되어 있는 것일까? 영원한 진리가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인간 역사와 언어 속에 담겨져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구별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설교자들이 일차적으로 건전한 성경의 해석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전한 성경해석은 좋은 설교를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설교자: 신의 선물, 인간의 노력


그러나 올바른 성경해석을 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좋은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설교자는 물론 하늘이 내어야 할 것 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위대한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라 불렸던 크리소스톰을 비롯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칼빈, 루터, 그리고 19세기 미국 뉴잉글런드 지방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의 요나단 에드워드, 부흥운동의 대표 주자들, 챨스 피니, 디 엘 무디, 챨스 스펄죤, 그리고 앞선 시대의 매튜 브랙우드, 죤 맥그라렌, 해리 에머슨 포스딕, 그리고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설교가들 빌리 그래함, 죤 스토트, 마르틴 로이드 죤스 등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 선사하신 '신의 선물들'(divine gifts)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훌륭한 설교자는 고되고 기나긴 자기훈련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설교자가 주석해야 할 두 가지 대상


사람들에 의하면,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을, 또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칼 바르트가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설교자는 우선 '책의 사람'(man of book)입니다. 그는 한 평생 책의 사람으로 살고 책의 사람으로 죽습니다. 책이 그의 삶 전부이며 그는 전적으로 그 책에 의해 지배를 받고 살고 책의 지시를 받고 길을 갑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바로 '그 책'(The Book)인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 책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선포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책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통하고 정확해야 하며, 그 책을 올바로 정당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무지한 것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핑계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책의 사람으로만 끝나면 온전한 설교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자는 '사람'을 올바로 주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국 메시지를 들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라면, 설교자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의 청중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깊이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에 관해 특별히 강조점을 두려고 합니다. 프래드릭 뷰크너는 그의 한 저서에서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즉 우리는 신앙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하고 또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열심히 일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게으름을 피우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기도, 꿈을 꾸기도 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좋은 때가 있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기도 끔찍한 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잔인하게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화 날 때가 있고, 지루할 때도 있고, 무서워 두려워 할 때도 있고, 어떤 열망으로 마음 조릴 때도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은 '인간적인 일'들을 하는 자들이 바로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단지 진열장이나,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이나, 화재 보험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신앙이란 바로 이와 같은 풍성하고도 다양한 인간의 경험의 혼합물, 축적물로부터 자라가기 때문입니다.

성서 신앙의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순간들 속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순간들 속에서는 우리는 그저 가장 인간적일 수밖에, 가장 우리적 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순간들, 경험들, 구체적 삶들 속에서 만나시는 분이 우리의 신앙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순간들과 '만나지도 닿지도'(touch) 못한다면, 때때로 우리는 우리에게, 우리 둘레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순간들과 사건들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도 상실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슬프게도, 자신들과, 그리고 하나님과도 '만나지도 못하고 닿지도 못하는'(lose touch with)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목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목사로서 내 자신 특별히 이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그러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목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것을 좀더 공개적으로 한다는데 ('만나지도 닿지도 못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말은 가장 역설적인 말입니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목사들은 성경의 모든 책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다시 말해서, 성경의 절대적이고 중심적이고, 통일된 주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역사적 경험들 속에 자기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분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장 중심적 주제가 아닙니까! 둘째로, 그들은 회중들로 하여금 한 인간으로서 '기도'라고 알려진 가장 깊고도 가까운 방식으로(intimate) 그리고 영혼을 찾는 심각한 찾음(searching)으로 그들 자신들의 경험들을 조사하도록 권고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세째로, 그들의 설교에서, 만일 그들이 설교를 옳게 한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현란한 좋은 소식,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계속적으로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삶 속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그 안에서 일하시고 사역하시어 우리를 그분의 깊은 사랑 안에서 자기에게로 점점 더 가까이 끌어들이시고 계신다는 좋은 소식의 선포자들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목사의 사역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 즉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보다도 더 중요할 정도로 우리의 관심을 쏟게 만드는 일들은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다시금,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어떠한 조짐도 보여주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설교와 선포에 있어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경험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하더라도, 종종 이런 경우, 설교의 요점을 예증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거나, 혹은 마치 넘어가지 않는 약을 삼키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보조수단으로만 사용한 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것들은,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영적으로 도산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 온갖 종교적 사업으로 배부르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본질적이고, 진정한, 그리고 일차적이면서 살과 피를 담고 있는 '진정한 이야기'(authentic story)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목사들도 그러한 순간들을 만나고 경험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종종 그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신뢰하지도, 그것으로부터 물을 긷지도, 그것들에 관해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들을 제쳐 놓습니다. 그것들을 숨기고 비밀로 간직합니다. 아마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에는 너무도 사적(私的)인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너무나도 사소한 일이기에, 혹은 너무나도 모호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혹은 종교적이지 않는 것 같기에, 경건해 보이지 않고, 그것을 말하면 권위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혹은 그들의 살과 피의 경험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이 너무 깊고 신비롭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그들의 모든 설교적 선언들(homeletical pronouncements)이 상대적으로 너무 공허하고 빈약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설교자들이 만나는 유혹은 설교적 선언들에 그냥 집착하는 일 뿐입니다. 그것들은(설교적 선언들) 공허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나 회중들에게는 적어도 매우 친숙한 것들이 아닙니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적 선언들은 점점 자라갑니다. 동시에 회중들도 설교적 선언들을 자연스럽게 기대하면서 나오게 됩니다. 또 그런 것들로부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한 설교적 선언들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은 생각을 자극하고 덕을 쌓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회중들을 붙잡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회중들도 그들이 너무도 자주 그것을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위협받거나 불안하다고 느끼지는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목사들은 매우 엄청난 위험 천만한 일들을 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삶 속에 있는 현존(現存)에 대해, 즉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증인으로 서지 않는다면, 또한 그들이 봉사하고 있는 회중들의 삶 속에 계시는 '현존하는 하나님'에 대해 증인으로 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엄청난 위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살아 계신 하나님,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시고, 그들이 그분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그런 하나님, 모든 비범한 놀라움으로 가득차있는 그런 살아 계신 하나님이 회중과 목사들의 삶의 중앙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증거하지 않는다면, 목사는 엄청나게 위험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목사들은 점점 전문인들 (professionals)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기관적인 종교의 모든 기술들을 마스터하고 종교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최대한의 권위(a maximum of authority)와, 동시에 최소한의 개인적 동참(a minimum of vital personal involvement)을 가지고 말하는 그러한 전문인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설교는 종종 피 없이 외치며, 또한 새 것처럼(진국이 없는) 외칩니다. 그들의 외치는 신앙은 그들의 삶에 뿌리를 두지도, 양육되지도, 도전되지도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선포하고 있는 신앙은 마음대로 떠다니는 배처럼, 제 2차적인, 열정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외침은 다 타버린 외침일 뿐입니다. 그들은 지겨움에 매번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우 기계적이고, 인간적 얼굴이 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분명히 목사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전문인들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아시겠지만, 나는 믿습니다, 그들은 들의 백합화들을 생각하도록, 이 나의 형제들 중 가장 작은 자들을 생각하도록, 길가에 떨어져 있는 죽은 참새들을 생각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목사이건, 크리스챤이건, 장차 크리스챤이 될 사람들이건, 그들이 지녀야할 자격이 한가지 있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깊이 생각해 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로 하여금 구역질 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심장과 가슴에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목사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 역시 나사렛 예수를 생각하도록,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에 실제적으로 사심으로써 인간의 삶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가를 보여주시지 않았던가요! 그분은 실질적으로 죽으심으로써 인간의 죽음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 아니었던가요! 목사들은 바로 '우리와 함께' 사시고 죽으시는, '우리를 위하여' 사시고 죽으시는, 아니 '우리에도 불구하고' 사시고 죽으시는 나사렛 예수를 생각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들을 바라보도록 - 오랜 전에 발생하였던 일들이나, 오늘 아침에 일어났던 일들이나 - 이 모든 일들이 위대한 드라마, 즉 그 안에서 영혼들이 잃어버린바 되고 구원받는바 되는 그러한 위대한 드라마의 한 부분임을, 아니 매우 중요한 한 부분임을 기억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삶들을 추적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를 풍요롭게 하거나, 혹은 우리의 설교를 발전시키려는 수단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은 진정으로 신성하고 거룩한 작업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나의 부모에 관한, 내 자녀들에 관한, 그리고 내 자신에 관한 비밀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길이 과거의 흔적들을 간직하는 길일 것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좀더 정직한 일 일뿐만 아니라, 나는 전혀 비밀이 없는 사람처럼 가장하는 것 보다 훨씬 흥미있는 일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이 비밀입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당신의 비밀들입니다. 우리들의 비밀은 인간들의 비밀들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 비밀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비로써 인간적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인과 예언자들, 그리고 설교자들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설교문은 산문체입니까 아니면 시문(詩文)이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여러분이 쓰셨던 설교 원고를 기억하시면서 이 질문에 답변해 보십시오. 아마 모든 설교자들의 원고는 산문체로 쓰여졌을 것입니다. 산문체로 설교문이 작성된 일에 대해 문제를 삼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구약 히브리 예언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히브리의 예언자들을 그들 당대의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향한 위대한 설교자들이라고 가정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매우 중요한 명제이기도 합니다. 좌우간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들의 설교들을 담고 있는 예언서들이 산문체로 쓰여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시문으로 기록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놀랍게도 예언서들은 대부분 시문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여러분에게 충격적으로 들리기를 바랍니다. 설교문이 시(詩)라니요! 그렇다면 설교자들이었던 예언자들은 시인이었단 말입니까?

원문으로 된 히브리 성경을 최소한 실제로 만져 본 경험이 있는 목사님들이나 신학도들이라면(신학교 다닐 때 원문 성경 과목 정도 하나는 택하였으리라 믿습니다!), 히브리 성경이 적어도 산문체와 시문으로 구별되어 인쇄되었다는 사실은 인식하였으리라 믿습니다(물론 신학대학원의 구약학 교수로서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학생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지만). 이야기체로 되어 있는 부분들, 예를 들어 모세 오경이나 역사서와 같은 부분은 대부분 산문체입니다. 반면에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와 같은 부분들은 대부분 시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서는 어떠할까? 앞에서 말한 대로 예언자들은 그들 당대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설교자들이었다면, 그리고 현대의 설교자들의 설교들이 대부분 산문체로 기록한다면, 예언서는 산문체로 기록되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매우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바처럼 사실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시인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시인들이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줄 것입니다.

부르그만(W. Brueggemann)은 설교와 설교자에 관한 매우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한 책에서 설교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설교의 두 가지 모형론적 범주를 가리키기 위하여 '산문'(prose)과 '시'(詩, poetry)라는 은유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산문의 세계'(prose world)라고 부른 것은 고정된 형식에 안주하고 인습에 이끌려 아무런 흥분과 열정, 정념과 생동감, 기대와 예측없이 지내는 평평하고 밋밋한 세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목회 기도도, 주일 아침에 선포하는 설교도 '산문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강단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아무런 열정도 없이 밋밋하게 산문의 세계를 소개할 뿐입니다. 마치 가도가도 끝이 없는 미국의 대 평원을 달리는 운전자와 같아, 지금 달리고 있는 길의 끝이 보입니다. 좌우를 보아도 항상 무미 건조 할뿐입니다. 설령 그 무엇이 달리는 운전자에게 나타난다 하여도 이미 오래 전에 예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평평한 대 평원을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위 '산문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단순히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들이 아무런 상관 관계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적으로, '시의 세계'(world of poetry)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시'라고 부른 것은 단순히 운율이나 박자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함축적인 언어들을 사용하여 세워진 '이상한 세계'(strange world)입니다. 또한 그 언어들은 엄청난 파괴력을 담고 있는 폭발물과 같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시인이 만들어 낸 세계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위험 천만한 세계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도약이 없이는 건널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시인의 세계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측된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시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이 보여주려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은 독자들에게, 청중들에게 바로 이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올 것을 촉구하고 초청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시문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상징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그들 자신이 매우 강력한 시인들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 설교자들에게 매우 지시적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부르그만(Brueggemann)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음미해 볼만합니다:


넓게 말해서, 성서 본문의 언어는 예언자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 본문의 언어는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인습들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실체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실체들을 예기케 하며 그러한 실체를 불러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성서 본문의 언어가 예언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시인/예언자는 정착되고 안주된 실체를 산산조각 내는 목소리이며, 귀담아 경청하는 회중들 속에 새로운 가능성을 자극하여 불러내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설교란 이러한 위험천만한 언어 습관, 그러나 반드시 필수적이어야만 하는 이러한 언어습관을 계속하는 행위입니다. 본문에 대한 시적(詩的) 연설(poetic speech), 설교의 시적 선포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당연시 여기는 이 세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를 예언자적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설교자들은 고대의 히브리 예언자들처럼 새로운 세계, 일반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계가 아닌 세계, 좀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뒤집혀진 세계'를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부르그만의 용어를 다시 빌려 표현하자면, 설교는 '대안적(代案的) 세계에 대한 시적(詩的)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경우, 그들의 설교의 목적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scenario)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세계에 대한 새로운 대안(alternative)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주장은 좀더 분명해 졌습니다. 히브리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그리고 그들의 남겨 놓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예언서들은 매우 강력하게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를 불의와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는 인간의 세상을 향해 본질적인 대안의 세계로 선포하고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포는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와는 병립할 수 없는 이 세상 나라들의 ― 그 나라들이 누구이든 간에 상관없이 ― 전통, 인습, 세계관, 가치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며, 따라서 그들의 전적인 포기와 항복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 예를 들어, 불의한 자들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비판,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찬 자들을 향한 사회-정치적 비난, 야웨 하나님 없는 이방 열국을 향한 전 세계적 비판, 제사의식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는 종교주의자들에 대한 종교-제의 비판 등과 같은 주제들은 바로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와 다스림이라는 포괄적인 예언자적 메시지의 빛 아래서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사항들입니다. 심지어 구원의 미래에 대한 선포마저도 당대의 언약 백성들의 삶에 대한 비판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설교는 예언자적/종말론적이어야 한다


예언서를 다루려는 설교자들은 바로 이 점을 깊이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메시지는 언약 백성의 현재의 삶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오는, 다가오는 왕과 그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삶 속으로 들이닥치는 왕이신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을 가지고 오십니다. 예언자 선포의 이러한 양대 축(심판과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키는 기둥들입니다. 심판을 통하여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앞에 인간은 머리를 떨구고 그 앞에 그들의 불의와 악행들, 오만과 독선을 참회하고 그의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가지고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인간은 무한한 감격과 보은으로 그분의 사죄의 은총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결국 설교자는 언약 백성들 앞에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제시하고, 죽음을 넘어 사역하시는 생명의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메시지는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래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새로운 삶은 가능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청중에게 새로운 존재의 시작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입을 열어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청중들이, 언약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응답하지 않고 거절한다면 그에게는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포는 단순히 협박이나 설교자의 영적 우월감으로부터 기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영혼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그리고 긍휼로 부터 나와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며, 예언자들중 '예언자' 되신 예수님의 선포도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설교는 예언자적이며, 시적이며 종말론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설교의 노력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그의 다스림을 집행하는 진정한 왕 하나님께 모든 청중들의 무릎을 꿇게 하는 초청이며 설득이며 선포인 것입니다.


끝맺으면서


설교문을 완성시켜 가는 동안에 설교자들은 그들이 예언자/시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의 말씀을 위탁받은 자들로서, 그리고 그분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통치를 불의하고 분쟁 많은 이 세상을 배경으로 하여 감연히 선포하는 자들로서, 설교자들은 예언자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으로서 그들은 옛 히브리 예언자들이 그처럼 풍성하게 사용하였던 다양한 심상(image), 은유(metaphor), 그리고 적절한 언어사용을 통하여 청중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 언약 백성을 하나님의 '이상한 나라'로 강력하게 초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메시지 앞에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머리를 떨굴 것이며, 어떤 이들은 뭉클해진 가슴을 어루만질 것이며, 어떤 이들은 옷깃을 여밀 것이며, 어떤 이들은 한없이 흐르는 감격의 눈물을 추스르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의 은총과 자비를 체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열정'(熱情), 그리고 '정념'(情念, passion)의 진정한 맛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깨어진 마음의 상처에 주어질 치유가, 죄책으로 인하여 죽어 가는 영혼에게 안겨질 생명이, 암담한 미래 앞에서 절망하는 여인에게 주어질 희망이, 무기력한 일상생활의 답답함으로 가득찬 한 남자에게 채워질 기쁨이, 가정과 공동체를 깨뜨리는 분단 대신 평화가, 다음 주일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게 될 본문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바로 이러한 '정념'(情念, passion)은 우리의 주석 작업에 불길을 당길 것이며, 이 불길은 다시금 '메시지'로 우리 심장을 불태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언서로부터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감격이 있기를 바라면서 주의 인도하심이 여러분의 설교사역위에 항상 함께 있기를 기원합니다.

류호준 목사 (dhryou@hotmail.com)

2007/04/16 20:32 2007/04/16 20:32


01. 여러분들이 섬길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언제나 인격적으로 대하셨고 또 지금도 그러시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교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십시오.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참된 목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여러분들의 목회성공을 위해 동원되는 필요한 ‘도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꿈꾸는 목표나 이루려는 프로젝트를 위해서 마땅히 있어야하는 연장이나 도구처럼 사용하거나 이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그들의 관계는 마르틴 부버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나와 당신’의 관계여야하지 ‘나와 그것’의 관계여서는 아니 됩니다. 주체와 대상, 혹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될 때 비로소 인격적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인격적 주체가 여러분들이 섬길 사람입니다. 목사들은 그들의 설교를 통해서, 훈육을 통해서, 목자의 애정을 담은 돌봄을 통해서, 그들이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 교인들 역시 목사들의 그런 사역들을 통해 자신들이 그들의 목사들에 의해 진심으로 사랑받고 돌봐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야할 것입니다.

02. 어느 정도는 기꺼이 잃어버릴 각오도 하십시오.

모든 것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욕심입니다. 어느 정도는 잃어버릴 준비도 되어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꿈꾸고 계획하는 모든 일들을 다 성취하겠다는 발상은 목적 지향적, 성취 지향적 동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사역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조직체를 이끌어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직체이기 이전에 유기체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료계에서 흔히 하는 말처럼, “수술을 성공했지만 사람은 죽게 되었다”는 웃지 못 할 사실이 교회에서도 현실화 될 것입니다. 교회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조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언제나 사람을 위한 목회,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목회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을 위해서라면 목사는 언제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목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리더십을 허락해야합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일은 없어야합니다. 그러면 혈압도 올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03.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슬픔과 비통함을 고귀하게 여기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겪는 비애와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슬퍼하십시오.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기술자들처럼 슬픔이나 고통을 ‘고치려’ 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목사들은 말하는 연습보다는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마 신학교에서 잘 배우지 못한 것 중의 하나는 ‘듣는 기술’입니다. 아니 ‘듣는 예술’이라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인 중 한 명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고 슬픔가운데 있을 때, 허황된 위로나 권면으로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물론 좋은 의도로 시작을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적(神的) 위로나 권고를 준다고 본인은 생각하겠지만 그런 것은 오히려 화를 불러 올 수 있습니다. 목사는 인간적 얼굴을 갖는 목회자가 되어야합니다. 욥이 울부짖으며 하늘 궁정에 계시는 하나님께 따지려고 돌진하였을 때, 그의 친구들이 입을 다물고 침묵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더라면 그들은 욥의 진정한 친구들이었을 것입니다. 간혹 어떤 목사들은 어려운 일을 당해 괴로워하거나 슬피 우는 교인들을 향해 그들의 문제를 ‘수선’하려드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차라리 가만히 있거나 그들의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는 편이 훨씬 현명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해주는 신학자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어 우는 목사입니다.

04. 조언과 충고를 기쁘게 받으십시오.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임을 인도할 때 혼자만 마이크를 독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항상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은 목사가 말을 하면 “설교 하시네”하고 말을 할까? 침묵할 기회가 있으면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자신만이 모든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자기기만과 아집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은 전문가이고 교인들은 비전문가라는 잘못된 생각은 나중에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담아 들으며 그들에게 기꺼이 조언을 구하십시오. 물론 다른 사람의 충고나 조언을 듣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경고나 권면을 무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아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아들에게 훈계와 설교와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른 채 한참 설교 중이었는데, 아들이 하는 말, “아버지, 지금은 강의 시간이 아니에요. 대화하는 시간이에요.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지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아닙니다. 교수는 말하고 학생은 듣지만, 부자지간에는 그렇지 않아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강의에 익숙한 직업병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와 교인의 관계는 선생과 학생사이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거나 남편과 아내사이의 관계여야하며,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는 신뢰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그런 대화를 통해 때때로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조언과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05. 비판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한 가지 비판을 하기 위해 열 가지 칭찬을 하는 방법을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때론 무차별적으로 비판을 퍼붓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비판을 많이 삼켜야 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사전에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약을 많이 먹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비판할 때, 그 비판을 친절하고 부드럽게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비판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 비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그것을 따지려 들지 마십시오. 진실은 언제나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하셨던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비판 받는 일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 두려움 뒤에는 상당부분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열등감의 발로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06. 충격을 흡수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목회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이 그렇듯이 신앙생활도 역시 항상 교과서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일들과 사건들 치열한 충격들이 오거든 되받아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지 말고 당신의 온몸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정규적으로 십자가 밑에 풀어놓으십시오. 무엇인가 강하게 다가오거든 여러분은 그것을 한 걸음 뒤로 물러가며 부드럽게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충격이 훨씬 감소될 것입니다. 충격 흡수 장치가 잘 되어있는 운동화를 신으면 신체에 무리가 가지 않고 오히려 건강에 유익합니다. 좋은 자동차일수록 도로면에서 오는 충격을 최소화하여 실내의 안온함과 편안함을 유지해줍니다. 대형기계일수록 ‘충격흡수’(shock absorber)장치는 더더욱 필요한 법입니다. 다시 말씀합니다. 삶의 무거운 충격이나 무게를 감당하려면 그것들에 대해 저항하지 마십시오. 강하게 저항 하면 할수록 부러지거나 무너져 내립니다. 오히려 부드럽게 그러나 확고하게 받아들이십시오. 비행기가 착륙할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무거운 쇳덩어리가 새처럼 하늘을 날다가 땅에 내릴 때 말입니다.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대형 비행기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러나 착륙할 때는 부드럽게 착륙해야합니다. 일명 ‘연(軟)착륙’(soft landing)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활주로와의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합니다. 승객의 입장에서 착륙하는 것을 거의 느끼지 않을 정도라면 그 비행기의 조종사의 착륙기술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일 것입니다. 또한 급정거함으로써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이나 사고를 없애기 위해 얼마동안 활주로를 따라 달려갑니다. 비행기 착륙을 신앙생활, 특별히 목회생활에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거친 말(馬)일수록 부드럽게 다루어야합니다.

07. 목회사역이외의 삶도 가지십시오.

이 말이 요즈음 젊은 목회자들에게 적용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목회자상은 아직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던 시절의 목회자들입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그분들은 오로지 소명 하나에 자신의 온 삶을 다 바치려는 열정과 헌신으로 가득한 목사님들이었습니다. 교회일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목회하였던 분들입니다.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논길, 밭길을 가로질러 터벅터벅 걸어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 거립니다. 연약한 노인이나 병든 교인들, 시험에 들어 삐딱해진 영혼들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을 떠올리며 “목회사역 이외에도 삶을 가지십시오” 라고 호소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호소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목회자들이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종류의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위에 언급한 옛날 목회자들처럼 목회에 목숨을 거는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나 사시(斜視)적인 목회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목회에 ‘올인’(all in all)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번 끝장을 보겠다는 강한 집념과 각오로 목회에 임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볼 때 이런 사명감에 충만한 사역자는 마땅히 찬사를 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한번 나도 성공해야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깔려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넉넉한 마음을 상실한 인간적 열정주의의 발로인지도 조사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무대로서 목회를 바라보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로지 앞을 향한 전진만 있고, 모든 것들은 그들이 꿈꾸는 계획의 성취와 성공을 위해 동원되어야할 도구들일 뿐입니다. 이 도구들에는 자기가 섬겨야할 교인과 가족들까지 포함됩니다. 교인들은 목회사역의 목적이어야 하는데 그 사역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역자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동원하게 됩니다.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선동이 되고, 교인은 도구화 되어 갑니다. 목회 자체는 ‘비인간적 왕국 프로젝트’가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사역자들의 조바심입니다. 무엇인가를 이루어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들을 안절부절 하게 하고 조급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런 사역자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권면합니다. 성공해야겠다는 조바심과 강박관념을 던져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일화를 들어보십시오.        

1522년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한 설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설교했고 연구하고 글을 썼을 뿐이다. 그 외에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글을 쓴 후에 나는 잠을 자거나 아니면 내 친구들인 필립과 암스톨프와 함께 한가롭게 비텐베르크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황제나 왕도 감히 약화시킬 수 없었던 교황의 절대적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렇다.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모든 일을 다해냈다."

이 말은 루터가 맥주에 관해 가장 멋지게 표현 한 구절 가운데 하나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신앙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주석입니다. 루터는 단순히 씨를 뿌린 농부일 뿐이었습니다. 씨가 그의 입에서, 그의 펜에서 떨어져 나간 후에, 그는 그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친구들과 어울려 편안하게 지내었습니다. 씨는 스스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씨는 루터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씨는 루터의 열심과 분주함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독일 사람들이 개종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은 루터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고 자라게 된 것은 루터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교회의 새 생명을 창조한 창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면서 설교단에서 내려올 수 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비텐베르크 맥주를 마시며,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즐겁게 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회사역 말고도 삶의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들의 꽃들을 감상하고, 자녀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들과 가끔 외식을 해보십시오. 아내나 남편과 산책을 하거나 여유가 있으면 간혹 여행을 떠나보십시오. 일중독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여유와 성실의 균형, 휴식과 일의 멋진 리듬을 타게 될 것입니다.

08. 당신이 하는 일에 진정으로 어깨를 함께할 협력자를 찾으십시오.

광야 길을 가는 외로운 여행자에게 동반자가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은 없을 것입니다. 동반자는 친구이며 동무입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친구라는 말보다 동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어릴 때 함께 먹고 놀고 지내는 친한 아이들을 ‘어깨동무’라고 부릅니다. 또한 어깨동무하다는 말은 팔을 어깨에 얹고 나란히 서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히브리어 관용어에도 어깨동무하다는 것은 “힘을 합하다,” “마음을 합하다”(一心)는 뜻입니다. 길이 없는 광야를 지나가는 두 나그네가 있다고 합시다.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가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마음을 합하여 간다면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행복한 여행이 될 것입니다. 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같은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두 마리의 소를 연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마음을 하나(一心)로 묶다”, “어깨를 같이하다”, “힘을 합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교회애서 목사와 장로들은 같은 명에를 메고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한 겨리의 소들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먼저 장로님들과 동역하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그들도 목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함께 일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을 견제하는 사람이나 목사의 라이벌로 보지 말고 동역자로 생각하십시오. 물론 장로들 역시 목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목사들 가운데 간혹 들리는 말은 “목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장로들의 기선(機先)을 제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조직폭력배적 사고에서 나온 말입니다. 활동 영역이나 영토를 넓히기 위해 혹은 헤게모니를 잡기위해 서로 경쟁하는 두 조직 파벌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온갖 계획을 다 꾸밉니다. 그러나 목회자와 장로들의 관계가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이 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목회자와 어깨를 같이 할 사람들은 장로들뿐 아니라 교회의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아내나 가까운 친구들이나 동료 목사들로부터도 영적 도덕적 정신적 지원을 받으십시오.
 
09. 목회사역을 즐기십시오.

목회(牧會)는 말 그대로 목자가 양떼를 이끌고 초원을 다니면서 먹이고 누이고 보호하고 돌보는 일입니다. 푸른 초원에서 양들이 풀을 뜯어 먹으면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보면서 목자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흡족해 합니다. 물론 항상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몹쓸 들짐승들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들짐승들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그런 위험한 일을 한 후에도 즐거움과 기쁨을 느낍니다. 일종의 ‘피곤한 즐거움’ 말입니다.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물려오는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목회하는 일에서도 그런 보람을 느낄 때 비로소 목사는 자신이 소명에 적합한 사람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목회를 하십시오. 마지못해서 하거나 혹은 억지로 한다면 부작용은 자신에게뿐 아니라 회중들에게 나타납니다. 즐기면서 하게 되면 일 때문에 찾아오는 피곤함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얼굴에는 언제나 피곤한 즐거움이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평안을 선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 그 때가 가장 좋은 순간이든지 아니면 가장 비참한 상태였던지 상관없이 - 깊이 참여하도록 초청받았다는 사실은 목사만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특권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부분, 영원까지 이어지는 삶 속까지 참여하도록 초청받겠습니까? 목사는 그들의 삶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겪는 고민과 좌절, 탄식과 갈망을 목격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고 그리스도께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목사는 교인들을 축복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도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사역을 즐기십시오. 정말로 즐거운 일입니다. 매주일 누군가에게 최상의 음식을 준비하여 준다는 것처럼 즐겁고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십시오!
2007/04/16 20:30 2007/04/16 20:30
성령을 소멸치 말라
Theology, (2007/04/16 20:29)
* 이 글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이신 조병수 교수님의 글임을 밝힙니다.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어느 때보다도 성령이 훨씬 강하게 강조되고 있다. 성령의 세례, 성령의 충만,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이러한 말들이 우리 시대의 기독교를 장식하고 있다. 지금은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성령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렇게 많이 성령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성령에 대한 것만큼 혼돈을 일으키는 것도 없다. 혼돈이 일어나는 이유는 성령을 대체로 체험이나 심지어 공상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지, 성경에서 이해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성경으로 성령을 이해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체험이나 공상으로 성령을 이해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교훈 가운데 많은 구절들이 오해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살전 5:19이다("성령을 소멸치 말라").

"소멸하다"는 쉽게 말해서 "끄다"를 의미한다. 여기에 세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첫째로, 하필이면 "성령을 끄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을 불로 생각하는 것이다(참조. 마 3:12/ 눅 3:17; 막 9:43, 48). 그러나 성령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불로 이해된 적이 없다. 심지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마 3:11/눅 3:16)이란 말씀과 "불과 같이 갈라진 혀들"(행 2:3)이란 말씀도 성령을 불로 말하지는 않는다. 앞 절은 분명히 성령과 불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뒤 절은 단순히 성령 강림에 동반된 한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며, 게다가 불이 임한 것도 아니다("같이"에 주의!).

둘째로, "성령을 끄다"라는 말이 자칫하면 성령을 멸절시킨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누가 삼위 가운데 한 인격이신 성령(고후 13:13)을 멸절시킬 수 있단 말인가?

셋째로, "성령을 끄다"라는 말로부터 사람이 성령과의 관계를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성령을 켜거나 끄거나 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생각은 어림도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분명히 "성령을 주신 분이 하나님"(살전 4:8)이라고 역설함으로써 인간이 성령을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성령을 끄지 말라"는 뜻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데살로니가전서에 몇 번 사용된 성령에 대한 구절들(살전 1:5, 6; 4:8)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복음 전도와 관련이 있다. 성령이 없이 전도자는 복음을 전할 수 없고(1:5), 성령이 없이 피전도자는 말씀을 받을 수가 없다(1:6). 전도자는 성령으로 복음을 깨닫게 하며, 피전도자는 성령으로 말씀을 깨우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하는 빛이시다. 성령은 계시의 영이다(엡 1:17). "성령의 임무는 우리의 마음을 밝히는 것이다"(Calvin, 살전 5:19 주석). 성령의 조명이 강조되고 있다. 성령의 조명 하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을 들었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이 말씀이 믿는 데살로니가 사람들 속에서 역사 하였다(살전 2:13).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의 조명을 잃어버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과 말씀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가 끊임없이 신자들을 습격하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둘째로, 성령은 거룩함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살전 4:3∼8에서 성도의 거룩함을 다루면서 특히 성도들이 이방인처럼 음란과 정욕의 더러움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더러움에 빠지는 것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을 위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거룩함을 저버리는 것은 "성령(거룩한 영)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살전 4:8)이라고 경고한다. 이 말은 물론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은 성령도 저버리는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거룩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거룩한 영"을 소멸하는 것이다!
2007/04/16 20:29 2007/04/16 20:29
2007/02/08 12:35 2007/02/08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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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Touching Story, (2006/09/10 20:17)
세상이 물질주의에 오염되고,
탐욕에 피로해진 까닭인지
무소유에 대한 그리움이 많습니다.

기독교적 무소유란 어떤 것입니까?

세상과 삶이 허무한 것이기에
무를 추구하는 무소유가 아닙니다.
물질은 악한 것이기에 물질을 터부시하며
무를 추구하는 반소유적 행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족하고,
있음 자체가 주는 넘치는 풍요의 바다에
삶을 던진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머니에 넣을 수 없고
이름을 붙여 내 것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의 큰 세계에 녹아들어
자신을 잊었을 때에 얻어지는 기쁨의 차원입니다.

기독교적 무소유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택함으로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 위의
식지 않는 존재의 감격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자기마저 바치는 아가페적 영성입니다.

2006/09/10 20:17 2006/09/10 20:17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더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  HOMER B. HULBERT  -

HULBERT의 고백처럼
나의 고향보다 선교지를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

잘 찍고 싶었다
그러나 묘비를 잘 찍는다기 보다
HULBERT의 조선사랑의 마음을 잘 담고 싶었다
2006/06/14 02:16 2006/06/14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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